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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만 사랑    
글쓴이 : 박승해    26-11-04 00:27    조회 : 12

 

반만 사랑

 


“반만 사랑하나요?”

그 남자는 사뭇 진지하다.

“하트가 반쪽이 잘렸네요?”

카페라테를 주문했던 남자의 커피잔에는 온전히 그리지 못한 반쪽짜리 하트가 이 상황을 그림처럼 설명하고 있었다.

카페의 한쪽 벽면에는 어느 작가의 작품들이 한 컷씩 느리게 지나간다. 요즘 유행하는 미디어아트 기법을 응용했다. 그림들을 한참 보고 있노라니 여기가 미술관이라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가끔 화면에 작품에 대한 설명과 작가 이름이 올라와 그림의 감상 포인트를 설명해 준다. ‘설명 없는 그림이 더 많은 것을 말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잠깐 했다. 나는 어느 그림에 몰입하던 중이었다. 파란 아이리스를 본 거 같다.

 

종업원은 말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적당한 답변을 생각하나 보다. 그녀는 이런 상황이 익숙해 보인다. 자주 있었던 일인가 보다. 계단형으로 만들어진 실내는 옆 테이블이 한 계단 아래쪽에 있다. 내가 앉은 곳에서는 약간 내려다보이는 자리이다. 그녀의 긴 생머리가 가는 끈으로 느슨히 묶여 있다. 난초 꽃잎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아주 잠깐 머쓱한 표정으로 나와 눈이 마주쳤다. 손을 가지런히 모은 여자는 난감해하면서도 뭔가 여유로움이 있었다.

남자의 테이블 위에는 방금 섞은 커피가 놓여 있었다. 세련된 잔의 날렵함이 카페 주인의 취향을 잘 보여준다. 아마도 어느 도예가의 작품인성싶다. 각 테이블 위의 찻잔 하나하나의 디자인이 다르다.

 

주방 쪽에서 살구색 앞치마를 두른 다른 여자가 천천히 다가왔다. 앞치마 안으로 깃이 넓은 흰 셔츠가 눈부셨다.

“손님 오늘은 하트가 반이어서 죄송합니다. 다음에 오시면 나머지 반을 꼭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녀의 얼굴에는 크림색의 미소가 지나갔다. 나는 안 보는 척하며 그래도 귀로는 한껏 집중해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주변의 다른 손님들도 나처럼 이 사태를 예의 주시했나 보다. 옆에 앉은 사람이 ‘킥’하고 웃었다. 그 웃음은 아이의 물방울 거품처럼 순식간에 다른 자리로 전파되었다. ‘킥킥’ 조용한 웃음이 그림처럼 소곤거렸다.

 

궁금했다. ‘저 앞치마의 주인이 혹시 이 잔들을 디자인했을까?’ ‘미디어 아트 속 그림을 그린 화가인가’ 어차피 생각은 내 자유니까 추리를 내 마음대로 해본다. 나는 카페 주인일 수도 있는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 눈앞을 천천히 지나는 그림의 주인일 수도 있는 누군가의 세련된 감각이 부러웠다.

커피를 주문한 남자가 다시 큰 소리로 웃었다. 남자의 건너편에 앉아있는 여자도 웃고 있다. 단 한 사람, 반쪽 하트를 만든 살구색 앞치마 그녀의 표정은 자못 진지했다. 그동안의 미완에 대한 비장한 각오라고나 할까?

“다음에 오시면 지난번에 반쪽 하트를 드셨다고 꼭 말씀해주세요. 제가 하트 그리는 걸 열심히 배워서 다음에는 제대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위기를 위트로 살짝 밀어낸 여자의 아름다운 여유가 멋지다.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세상의 굴곡을 안고 화평을 나누기 위한 도구이기도 하다. 인간의 얼굴이 양면의 자아를 가진 그것처럼 우리의 말도 마찬가지이다. 날이 선 말은 다른 반쪽의 부드러운 온유를 만나고 상처 입은 서로를 안고 다독인다. 테이블 위에는 서로 다른 커피가 다른 찻잔에 담겨 다른 향기를 내어준다.

살구색 앞치마의 그녀는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다시 카페의 공기 파동은 잔물결을 만들고 있다. 나는 미지근하게 식어버린 ‘산미’ 품은 커피 향을 아끼며 한 모금 입안에 넣었다.

 

개인 집 1층을 개조한 카페는 내부가 제법 널찍했다. 카페라기보다는 쉼터 같은 편안한 사랑방의 온기가 느껴졌다. 평소에는 거의 예외 없이 라떼를 마셨지만, 오늘은 아니다. 이 카페는 매일 다르게 ‘오늘의 커피’를 내주는 곳이다. 오늘은 라이트하게 로스팅한 커피라고 한다. 우리는 모두 같은걸로 주문했다. 자칭타칭 커피광인 지인의 추천이 오늘 빛을 보고 있었다. 함께 주문한 당근 케이크 위에 주황색으로 스마일을 그려 넣은 재치도 재미있다.

각자 사는 곳이 다른 우리는 그에 걸맞게 개성도 각각이다. 우왕좌왕 설왕설래 끝에 만남의 약속을 각자가 사는 곳의 중간쯤에 있는 강북의 한 갤러리로 정했다. 그림은 너그러움과 여유로움을 주는 몇 개 안 되는 현대인이 선호하는 취미 목록 중 하나다. 이번에는 모두가 의견통일을 보았으니 내 작전은 성공했다. 다소 소란스러운 점심 식사 후 우리는 인근의 둘레길로 산책을 나섰다.

 

타인의 공간에서는 이상하게도 역설적인 편안함을 느낀다. 낯섦이 주는 또 다른 매력이다. 이곳은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이곳의 시간은 강남의 10분의 1 정도의 속도로 움직이나 보다. 골목은 또 골목으로 이어져 또 다른 길을 만나고 있다. 어떤 길은 막다른 길이다. 언덕길 끝자락, 그곳에 드디어 도착했다. 갤러리 카페

 

좀 전에 보았던 파란색 아이리스 꽃잎이 다시 미디어아트 화면 속의 액자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그제야 내 커피잔에 파란 아이리스가 그려져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저 그림이 특히 친숙하게 느껴졌나 보다.

그 남자의 하트는 그리다 만 미완성이었다. 언젠가 그는 완전한 하트를 만나기 위해 이곳을 다시 오지 않을까? 우리가 커피의 짙은 향미에 취해 이 길을 또 오르듯이. 아마도 언젠가 그는 화가의 달라진 그림을 보러, 온전한 하트가 담긴 커피를 마시러 이곳에 다시 오지 않을까. 그때는 남자의 건너편에 앉아있던 여자가 그의 옆자리에 앉아있을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나의 커피는 보랏빛 아이리스 향기로 바뀌었다.

‘10월의 소슬바람이 붓질한 달콤한 노을빛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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