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전여행 대학생과 담임 선생님
사십여 년 전 나는 시골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아버지가 이발업을 하셔서 초등학교 때부터 줄곧 이발관에서 아버지를 도와 드려야 했다. 물지게로 물을 져다 날라야 했고, 바닥의 머리카락들을 쓸었다. 중학교도 포기해야 할 형편에서 운 좋게 고등학교까지 진학을 할 수 있었지만 중간, 기말 고사 때면 등록금을 제 때 내지 못해 집으로 쫓겨 오기 다반사였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학비를 면제 받기 위해 농장에서 일하는 화훼연구생이 되어, 새벽에 등교하고 해가 져서야 돌아 왔으며, 방학 때는 아예 농장 숙소에서 숙식을 하며 온실의 꽃을 돌보았다. 고2 때 연구생은 1학년만 한다는 규정에 따라 다시 시작한 나의 이발관 생활로 오전 열 시에 등교하고 오후 두 시에는 다시 이발관으로 가서 일을 도와야만 했었다.
고2 겨울방학 때였다. 큰 형의 점심을 가져다주기 위해 길고 큰 다리를 지나가다 한 대학생을 만났다. 그 대학생이 갑자기 영어로 “Are you a high school student?” “What grade are you in?” 하고 물었다. 나는 알아듣기는 했었지만 영어로 대답하지는 못해 한국어로 대답했었다.
그 대학생은 다시 우리말로 자기는 서울 소재 대학생인데 서울에서 진주까지 도보 무전여행을 한다고 소개를 했다. 그러면서 시골에서 살기 보다는 서울에서 살기를 권했고, 대학을 졸업하면 좋은 이유를 여러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해주었다. 정말 신선하고 멋진 충격이었다.
다음 날 부모님께 돈 오 천원을 얻어 대구 헌책방에 가 대학 예비고사 시험에 필요한 책들을 모두 샀다. 당시 농업고등학교에서는 일주일에 국영수 각3시간, 과학, 사회 각 2시간, 나머지는 모두 농업과목과 농장 실습이었으며 그나마 책 한 권을 온전히 다 배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또한 예비고사 과목에는 ‘지학’같은 생전 처음 보는 과목들도 있었다. 모르는 것은 선생님을 찾아 끊임없이 물었고, 걷거나, 밥을 먹으면서도 내손엔 영어 단어를 적은 쪽지가 있었으며, 수업 시간에는 책상 밑에 따로 입시 책을 놓고 공부했다.
그러나 같이 밤 마실 다니던 친구들과 대부분의 선생님들도 도와주셨지만 담임선생님만은 그렇지 않으셨다.
2학기 때 매일 있었던 교련 훈련을 피해 대구 학원으로 간 나는 독서실에서 숙식하며 공부하고 있었는데 쌀쌀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 어느 날 아버지가 학원으로 찾아 오셔서 집으로 돌아가자고 하셨다.
그 때 아버지가 침통하게 하신 말씀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너희 담임선생님이 네가 대학 예비고사에 합격하면 열 손가락에 불을 켜고 하늘로 올라가겠다고 하셨다는구나“.
나는 그 말을 쪽지에 써서 책상 앞에 붙여 두고 매일 매일 각오를 다지며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했다. 지금은 대학생들이 부러워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공기업을 정년퇴직하고 편안하게 살고 있다.
선생님이 보고 싶다. 그 대학생과 담임선생님이 없었으면 지금 나의 행복한 삶도 없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