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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명 : 정지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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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으짜꺼시냐    
글쓴이 : 정지민    13-01-18 22:24    조회 : 4,968
 
 
으짜꺼시냐
 
 
격월로 초등학교 동창모임이 정기적으로 열린다. 그날은 일부러 치과원장인 정훈이의 옆자리에 재빨리 자리를 잡았다.
“정훈아, 어제 친구들이랑 채석강에 놀러갔다가 말이지... . 엿장수가 엇따, 엿 먹어라! 하면서 길을 막고 공짜 엿을 내미는 거야. 덜컥 받아먹다가 어금니 쪽 땜질한 금니빨이 그만 쓸려나왔어.”
나는 손가락으로 입속을 가리키며 정황을 얘기한 후 내일 그의 치과병원에 들르겠노라 했다. 어릴 때부터 코부랭이에 욕쟁이라는 별명이 붙은 친구는 마시던 술잔이 든 손을 훼훼 저으며 오지 말라고 소리쳤다.
“야! 무슨 소리? 너희 동네엔 치과 없어?”
아는 사람 오면 귀찮기도 하거니와 오늘밤 술을 실컷 마실 것인즉 손 떨려 치료 못한다는 것이다. 토악질이 유독 심해 치료 받을 때 의사나 나나 별의별 일화가 많다는 사전정보를, 웃자고 한 건데 괜히 발설했구나 싶었다. 펄쩍 뛰는 정훈이를 살살 달래어 기어이 허락을 받아냈다. 그는 허락하는 대신 술이 깰 시각쯤인 해 넘어간 오후 늦은 시간에 들르라는 엄한 당부를 잊지 않았다.
시골동창들이 모인 자리이니만큼 이날 주로 어릴 적 얘기들이 화제가 되었다. 오지 말라고 손을 내젓던 분풀이 겸 정훈이한테 모이족이 호랑이 사냥 때 쓰는 독화살을 날렸다.
“욕 잘 하고 말썽 심하던 네가 광주로 전학 가버려서 속이 시원했어.”
정훈이의 고약한 반격이 날라들 차례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는 5학년 때 광주로 전학 가게 된 연유를 차분한 어조로 들려주기 시작했다.
“우리 어머니가 말이야, 아마 대한민국 치맛바람 원조 1호이실 거야.”
황량한 시절에 전라도 보성 깡촌에서 정훈이 어머니만큼 적극적인 교육의지를 보이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학교 내방이 잦던 것으로도 모자라 어린 아들을 광주로 전학시키기에 이르렀다. 사십여 년 전 일을 회상하는 정훈이의 낯빛은 이미 취기가 도도해져 불콰해 있었다.
“뜬금없는 타지에서 혼자 자취생활을 하라고 팽개치시는데 얼마나 외롭고 무섭던지... .”
집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어머니한테 수십 번 울며 애걸했다고 한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아들을 처연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이 한마디만 하시더란다.
“으짜꺼시냐...!”
큰물에 나가 부딪혀야지 시골에 머물러서 장래 볼 게 뭐 있겠냐, 어쩔 것이냐 도리 없지 않느냐였다. 이후 코부랭이에 욕쟁이였던 그는 치맛바람 원조 어머니의 의지대로 시골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광주 제일고교를 거쳐 서울대에 진학했다.
정훈이의 목소리가 한층 깊고 낮아졌다. 분위기는 사뭇 숙연했다.
“올해 84세이신 우리 어머니, 지금 치매가 심해져서 요양원에 계셔. 며칠 전 들렀을 때
나를 부여잡고 애원하셨어. 제발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말을 마친 정훈이는 별안간 소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내가 어머니 알아듣게 느릿느릿 말했지, 엄니, 으짜꺼시요...!”
오래 전 어머니가 철없는 자신에게 했던 말을 똑같이 따라하며 붙잡는 손을 가만히 내려놓고 돌아설 때 가슴속이 환장할 듯 뒤집혔고 억장이 무너졌다고 했다.
그 순간 내게도 언젠가 들었던 이 말이 아련하게 환청으로 들려왔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하던 때였다. 누구나 가난했던 시절이니 등록금 마련에 애간장이 탔던 건 비단 우리 집 경우만은 아닐 것이었다. 9남매를 두고 아버지가 일찍 세상 떠난 후 어머니 혼자 꾸리는 살림이니 궁핍함은 남들보다 더했던 듯하다. 등록날짜가 다 되도록 돈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어떻게든 빌려보려고 동네 여기 저기 다니며 사정을 했으나 집집마다 그만한 여윳돈이 없어보였다. 꼬박 이틀 동안 발이 짓무르도록 어머니와 함께 돌아다녔다.
등록금 마감일, 마감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린 마음에도 내 속은 시꺼멓게 타들었고 어머니 얼굴엔 절망감이 깊이 드리워졌다. 방장산 뒤쪽으로 하루해가 기울 무렵 몸도 마음도 지쳐서 두 모녀가 길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길섶에 누운 마른풀을 쥐어뜯으며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 바로 이 말이었다.
“포기하자, 으.짜.꺼.시.냐......!”
인생의 어느 한 부분에서 가장 섧고 간절했던 순간을 말하라 하면 이 때를 꼽을 것 같다. 서러웠다. 한참을 엉엉 소리내어 울던 내가 어머니를 일으켜 세우며 마지막으로 한 집만
더 가보자고 채근했다. 우리 동네 제일 부자로 알려진 제재소 집이었다. 제재소 집 딸인 미숙이는 나와 같은 반 친구였다. 미숙이 어머니가 동급생임에도 불구하고 내게 그 아이의 과외를 부탁해서 틈틈이 공부를 가르치고 있던 중이었다. 그 집에 가면 융통해 줄 것도 같은데 전날부터 어머니는 그 집만 겉돌며 도통 들어가려 하지 않으셨다. 이유를 모르지 않을 것이 불과 얼마 전 장날, 사달이 일어났다.
효자로 소문난 고등학생 두 오빠들이 제재소 앞에 쌓아둔 쌀가마에서 흘러나온 알갱이가 주변에 흩어져 있자 이를 빗자루로 쓸어 담았다. 어차피 땅바닥에 떨어져 나뒹구는 쌀알이고, 그것은 누가 주인이랄 것도 없던 거였다. 그때 제재소 주인인 미숙이 아버지가 뛰어나와 추위에 얼어 새빨개진 오빠들의 뺨을 냅다 후려갈긴 것이다. 미숙이 아버지는 부자인 반면 인색하고 온정이 없기로 인근에 평판이 좋지 않았다. 후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후보로 출마하여 겨울날 칼바람 부는 거리에 서서 행인들에게 표를 구걸하며 쉴 새 없이 절을 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죄인처럼 고개를 들지 못하고 절만 해대느라 나이어린 내가 지나가는 데도 “잘 부탁합니다.”라고 허리를 깊숙이 꺾는 모습에 웃음을 흘렸다.
어쨌든 그날 당신 자식들이 쌀 몇 톨 건지려다 손찌검 당했다는 전갈에 바람같이 달려오신 어머니의 진노라니! 색이 바랜 낡은 몸빼바지를 입은, 못 입고 못 먹어 무청처럼 파리한 촌부가 무소불위의 힘을 지닌 지역 유지를 사람 많은 데서 호되게 질타하는 모습을 목도했다. 그날따라 장날이라 사람과 가축과 누렇게 뜬 겨울채소가 뒤엉켜진 그날의 광경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오른다. 불가피했었을까. 평소에 한없이 유순하고 인자하던 어머니의 어디에서 그런 저항이 나왔는지 지금 생각해도 전율이 인다.
그 사건이 있고난 후라 어머니는 애써 그 집만은 피하려고 하셨던 것인데, 나는 알면서도 더 물러설 곳이 없었다. 결연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으짜꺼시요!”
남편과는 달리 인정이 넘쳤던 미숙이 어머니가 군말 않고 등록금을 빌려주셨다. 진작 오지 그랬느냐고 나무라면서... . 일금 삼천칠백이십 원, 잊을 수 없는 통한의 액수였다. 그분 아니었다면 내 최종학력은 국졸자가 되었을 것이다.
 
동창모임이 있고난 다음 날, 해가 기울 무렵 신길동 정훈이 치과병원을 찾아갔다. 거리가 먼 것은 문제되지 않았다. 각자 살아온 삶의 궤적이 달라 시골 동창모임이 때론 재미없게 느껴질 법도 한데, 신기하게도 그는 한 번도 모임에 빠지는 일이 없었다. 친구의 거친 이면에 내재한 따뜻한 심성과 성의, 그것이면 족했다. 예외 없이 치과 치료는 고역이었지만 친구를 힘들게 하지 않겠다는 각별한 다짐으로 인내하며 치료에 임했다. 실지로 의사에 대한 믿음 때문인지 다른 때보다 수월했다. 치료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핸드폰 문자 수신음이 울렸다.
“미안해. 구역질 심하다는 걸 깜빡하고 소리 질러서.”
쌍욕 안 해준 것만으로 고맙다고 가볍게 눙쳤다. 한포가 빠져 죽었다는 한포다리 밑에서 깨 벗고 놀았던 어린시절 친구들은 몽실몽실한 유년을 공유한 탓인지 껍데기는 거칠지언정 속은 순백이다.
나는 누구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그냥 입버릇으로 중얼거렸다.
“엄니, 으짜꺼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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