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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장안과 밖의 공기    
글쓴이 : 국화리    25-12-10 07:08    조회 : 67

                        

                                      담장 안과 밖의 공기


                                                                                                                  국화리

  정지된 화면이 내려앉았다.

 장례 예복보다 짙은 암흑 속에서 소리가 들렸다. 마치 장갑차가 한밤의 꽃밭을 짓밟으며 터뜨린 대지의 신음 같았다. 까만 적막을 가르며, 이름 모를 손과 발이 허공을 휘젓는다. 영혼들의 웅얼거림 같은 저음이 삼 분 가까이 이어졌다. 숨이 멎었고, 내 몸은 굳어졌다.

  화면이 밝아졌다. 여름 한낮, 나뭇잎이 흔들리고 새들의 지저귐이 높아진다. 강가의 수풀 사이, 수영복 차림의 두 가족이 웃음을 터뜨린다. 햇살 아래서의 웃음은 자유롭고 평화롭다. 그들은 담장 안의 사람들이다.

  가장은 저택에 살며 담장 밖의 모든 일을 통제한다. 그는 다른 이름의 아돌프 아이히만이다.


  폴란드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2024)는 히틀러의 최측근 루돌프 회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홀로코스트를 다루지만, 화면에 폭력은 없다. 카메라는 오직 담장 안의 일상만을 응시한다.

  가장은 아이들에게 동화를 읽어주는 자상한 아버지다. 아내는 손님을 초대해 수영장 파티를 열어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 가장의 부하는 수용소에서 그 가정에서 쓸 통조림종류의 식료품과 생활용품을 날라다 준다. 유태인에게서 빼앗은 귀중품이 들은 자루를 날라 온다. 아내는 가정부에게도 자루를 풀어 쓸 만한 물건들을 골라갖게 한다.

  아내는 특별 자루에서 나온 밍크코트를 입고 거울 앞에서 모양을 본다. 그 주머니에서 나온 루즈를 입술에 칠한다. 남편은 늦은 밤 다량의 낡은 지폐를 센다. 하인은 담장 밖에서 들여온 재를 정원과 채소밭에 뿌린다.

  담 안의 풍경은 완벽하다. 정원에는 키 큰 해바라기와 장미, 달리아가 피어 있고, 채소밭에는 케일과 양배추, 감자가 푸르게 자란다.

  어느 날, 여행 가방을 들고 여주인의 엄마가 방문한다. 그녀는 정원을 거닐어 보고 감탄하며 햇살 아래 눈을 감는다. 그 순간부터, 희미한 총성과 비명이 들려온다. 한밤중, 창밖으로 솟구치는 불길을 본 그녀는 새벽에 일어나 식탁 위에 쪽지만 남긴 채 떠난다. 그 뒤, 가장인 회스는 시체를 더 빨리 태우는 기술로 승진한다. 아내는 정원을 떠나기 싫어했고, 부부는 결국 따로 살아간다.

  마지막 장면, 회스는 자신의 송별 파티에서 구역질을 멈추지 못한다. 화면이 꺼졌지만, 나는 여전히 움직일 수 없었다. 처음 그 신음은 내 가슴속에 박혀, 박제가 되었다.

  맹자는 인간 본성의 단서로서 사단(四端)’을 말했다. 그중 측은지심은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는 감각, 곧 공감이다. 현대 심리학은 그것을 EQ, 즉 공감 지수로 설명한다. 어떤 이들의 공감 능력은 0에 가깝고, 우리는 그들을 냉혈인간이라 부른다. 그리고 역사 속 많은 범죄자들이 그러했다.

  히틀러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본 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썼다. 그는 법정에서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 항변했다. 아렌트는 그를 괴물이라 보지 않았다. 그는 평범하고 성실했으며, 가족에 헌신적인 남편이었다. 그의 악은 사유하지 않는 무능력, 생각 없는 복종에서 비롯되었다.

  악은 특별한 형상이 아니다. 괴물의 탈을 쓰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곁에 있다.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하고, 불의 앞에서 침묵하며, 질문을 멈춘 행위이다.

  히틀러 시대의 폭력은 한 개인의 광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법과 제도, 행정과 절차의 이름으로 집행된 국가적 범죄였다. 우리 역시 그 어두운 역사를 피해갈 수 없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광주 민주항쟁의 참상을,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을 기록했다. 둘 다 아름다운 문체를 지녔지만, 그 안에는 응어리진 고통과 뼈에 새긴 진실이 있었다.

   역사는 우리에게 말한다

  담장 안과 밖은 여전히 다른 공기로 숨 쉰다고. 그 공기의 밀도는, 공감의 유무에 따라 달라진다고. 우리가 진정한 인간이라면, 그 담장 앞에서 멈추어야 한다. 스스로 묻고 사유하며, 공기의 결을 인식해야 한다.

그럼에도 인류는 조금씩, 그러나 꾸준히 앞으로 나아간다. 정의롭고 투명한 법, 약자가 억울하지 않은 사회, 불의에 침묵하지 않는 시민의식. 그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향이다.

담장 밖의 고통에 귀 기울이는 사회. 사유하고 질문하며,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

그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은, 어쩌면 지금보다 조금 더 인간다운 공기로 채워질 것이다.

 

20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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