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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자문학    
글쓴이 : 김주선    26-03-27 16:51    조회 : 88

감자문학 /김주선

 

장마가 끝나자, 폭염이 찾아왔다. 무덥고 습한 날씨 탓일까. 비닐봉지에 담아 팬트리에 보관 중인 감자가 절반이 썩어 있다. 손가락이 푹 들어가는 문드러진 감자를 골라내자, 악취가 진동했다. 밀봉된 기억 하나가 이 틈을 노려, 나를 자판 앞에 당겨 앉혔다. 삶의 퇴적과 발효의 기록이랄까. 뚜껑을 열어젖힌 냄새는 어느새 고향 입구까지 나를 데려가고 있었다.

감자에 싹이 나서 잎이 나서 가위바위보

어린 날에 구령처럼 따라 불렀던 놀이다. 감자가 싹 트고 자라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겪은 아이들만이 알 수 있는 구절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출신을 나타내는 꼬리표이기도 했다. 도시 아이들은 우리를 감자바우라며 놀렸다. 본래는 믿음직한 강원도 남자를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조롱조로 아무 데나 갖다 붙였다. 사투리 억양은 이북 말투 같다고 놀림 받았고, 감자밥이나 감자 반찬이라도 도시락에 들어 있으면 괜히 숨고 싶었다.

딴 친구들보다 형편은 나은 편이었어도 감자바우라는 말은 마음에 깊이 남았다. 강원도 영월에서 태어났지만, 굳이 충북 제천으로 통학하겠다고 우긴 것도 어쩌면 그런 정체성에서 벗어나고 싶어 그랬는지도 모른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적답사기에서는 강원도민들은 이 별명을 아주 싫어한다라고 썼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어느 방송에서 이 단어가 재해석 되면서, 이제는 강원도민의 강인한 기질, 끈질긴 생명력, 믿음과 검소함을 상징하는 말로 회복되었다. 강원도 출신 작가나 예술인 중에는 감자바우라는 정체성을 기꺼이 수용하고, 작품 속에 유쾌하게 녹여내는 이들도 있다. 

어릴 적 동네에, 태백 탄광에서 진폐증을 얻은 아버지를 따라 이사 온 가족이 있었다. 그 집 맏이는 나보다 한 살 많았지만 살림하는 모습은 어른 같았다. 줄줄이 동생들을 돌보고, 밥 짓고, 감자 손질까지 도맡았다. 놋숟가락으로 껍질을 벗기던 손은 야무졌다. 끝이 반달처럼 닳은 숟가락이 세월을 말해주었다.

그네 집엔 감자밭이 없었다. 대신 남의 밭일을 도와 품삯으로 생채기 난 감자를 얻어왔다. 먹다 남은 것은 일부러 썩히기도 했다. ‘삭힌다라는 말이 어린 나에겐 생소했지만, 그게 바로 삶의 지혜였다. 고무통에 감자를 가득 담아 두세 달 삭히면, 온 동네에 고약한 냄새가 퍼졌다. 우사에서 나는 소똥 냄새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다. 마치 가난이 발효되는 냄새 같았다. 삭힌 물은 또 얼마나 독한지, 천연 제초제나 살충제로도 쓰였다. 솔라닌이라는 독성 물질 때문이었다.

오죽하면 기근을 구한다는 구황작물로 불렸을까. 한국 근대문학에서도 감자는 종종 빈곤과 인내의 은유로 등장한다. 김동인의 단편 감자에서 복녀는 감자를 캐다 결국 삶에 무릎을 꿇는다. 감자는 그녀에게 생존 식량이자 삶의 도구이며, 가난한 여성을 옥죄는 구조적 폭력의 상징이었다. 고흐의 그림 감자 먹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작은 등불 아래 찐 감자와 커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이들의 손과 얼굴엔 고단한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상처 난 감자 덕분에 친구네는 대를 이어 떡집을 했다. 돈을 벌어 읍내에 자그마한 건물을 올렸고, 감자떡은 지역 특산물이 되었다. 흐물흐물해진 감자에서 녹말을 우려내고, 한 달 넘게 냄새를 빼는 씻김의 시간을 거치면 뽀드득거리는 고운 가루가 남는다. 그렇게 만든 감자송편은 생감자떡보다 훨씬 맛이 깊다. 후덥지근한 여름 창고는 썩은 내로 뒤덮였지만, 팥소를 넣은 감자송편은 별미였다. 장맛비가 그치면 엄마는 곳간부터 살폈다. 떡을 얻는 재미를 들이셨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냄새는 견디기 힘들었는지, 자주 하지는 않았다. 대신 맷돌에 생감자를 갈아 전분을 추출했다. 

글을 써 떡이 생긴다면 얼마나 좋을까. 녹말이 가라앉듯, 나는 글을 오래 묵히는 편이다. 감자는 계절을 기다려 삭고, 글은 마음의 계절이 와야 익는다. 문단을 들어내거나 결말을 바꾸기도 한다. 그래도 대부분은 글감 창고에 두고 삭힌다. 시간이 흐른 뒤, 뚜껑을 열어 불필요한 수식어를 걷어내고, 둥둥 떠다니는 부유물을 걷어낸다. 맑은 물로 헹구고 또 헹구다 보면, 바닥에 가라앉은 녹말가루 같은 문장이 남는다. 글이란 것이 결국 발효와 침잠의 시간 속에서 향기로 거듭나는 일이 아닐까. 시간이 지나야 글이 익고, 다시 써볼 용기가 생긴다. 나는 그런 글쓰기를 아이러니하게도 감자문학이라 부른다. 햇볕을 오래 받으면 독을 품기도 하지만, 물컹거리는 속살에서 정제된 문장을 건져내는 나만의 작업이기도 하다.

감자꽃 필 무렵이 농사꾼들에게는 가장 고단한 계절이었다. 지금은 꽃을 꺾지 않아도 되는 품종이 나왔지만, 예전에는 꽃을 꺾어야 씨알이 굵어졌다. 영양이 꽃으로 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 일은 대부분 여자의 몫이었다. 보릿고개와 겹쳐, 고된 계절을 감당하던 건 우리네 어머니들이었다.

요즘 아이들은 썩은 감자라면 당연히 버려야 할 것으로 여기고, ‘숙성이란 말은 비싼 음식에나 붙는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버림의 끝에서 색다른 음식으로 탄생하는 작물이기도 하다. 퇴색되고 무른 시간을 지나야만 얻을 수 있는 풍미였다.

썩은 감자라고 손가락질받던 것이 귀한 음식이 되었듯이, 나도 푹푹 찌는 계절에 대충 뭉뚱그려 놓았던 문장을 거른다. 온 정성을 치대어, 쫀득한 감자문학을 빚는다.

 

 『한국산문』 2025.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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