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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설    
글쓴이 : 김주선    26-02-24 16:04    조회 : 203
서설/김주선

어디쯤 왔을까, 주섬주섬 옷을 껴입고 봄 마중을 나간다. 요 며칠 전, 사흘 내리 비가 오더니 갑자기 돌변한 날씨는 눈을 퍼부었다. 올해 들어 가장 많은 눈이었다. 동장군의 기세로 말갈기처럼 흩날리던 눈보라가 하루도 못 가 땅속으로 녹아들더니 눈석임물이 되었나 보다. 도랑 돌 틈에서 뽀글뽀글 물풍선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아직은 깊은 응달이라 살얼음이 끼었을 텐데 성급하게 봄을 기다리는 것이 어디 개구리뿐일까. 서둘러 봄옷을 꺼내 입었다가 고뿔이 들어 한 사흘 앓아누웠다. 절기상 입춘이면 집안에서는 봄을 가꾼다지만, 우수가 지나도 남한산성 위례 골짜기는 여전히 냉골이다.

샤갈의 마을엔 3월에도 눈이 온다던가. 사내의 관자놀이에 돋은 정맥이 바르르 떨리도록 춥지만, 떨기나무의 쥐똥만 한 열매가 올리브색으로 변하는 봄이란다. 3월의 눈에는 연분홍 꽃향기가 난다더니 봄을 알리는 소식임이 틀림없는가 보다. 내 고향 영월에도 삼월에 눈이 왔다. 강원도는 민들레 전령이 가장 늦게 도착하는 곳이긴 하다. 서울 촌놈들이 반소매 티를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사오월에도 철원에 있는 군부대에 입대한 오빠는 눈을 치웠다고 허풍을 떨었다. 어느 해 벚꽃 필 무렵에, 대관령을 넘다가 진눈깨비를 만나고서야 거짓이 아님을 알았다.

봄눈이 내려야 진정한 풍년을 기약할 만큼 삼월에 내리는 눈을 내 고향에서는 서설瑞雪이라고 불렀다. 복되고 길한 조짐이 있다고 상서로운 눈이라 풀이했다. 대체로 입춘 무렵에 내리는 눈이거나 적시에 적당히 내리는 것을 서설이라 하기도 한다. 대설특보가 내려질 만큼 발이 묶이고 피해가 크다면 재난이겠지만, 대부분 눈은 상서롭다고 할 정도로 반가운 손님이기에 자연이 이롭다. 연못의 얼음 아래서도 물고기가 살고 눈 속에서 설중매가 피듯 봄눈은 바람막이가 되고 만물을 소생시키는 생명수가 되기도 한다. 방석처럼 납작 엎드린 냉이, 봄동도 눈을 맞고 추위를 견뎌야 달았다. 언 땅에 뿌리를 내린 식물일수록 향이 짙고 색깔이 진하니 그 생명력이 놀랍지 않은가.

1987년 3월 25일 수요일, 예정일이 한참이나 남았는데 딸아이는 세상에 나오려고 밤새 기를 썼다. 아이 아빠의 팔에 안겨 병원까지 가는 백여 미터가 그렇게 긴 거리인 줄 몰랐다. 남쪽 지방에서 꽃소식을 전해오는데 그날, 서울은 눈이 왔다. 함박눈이었다. 전날까지도 멀쩡하던 날씨가 밤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눈이 와도 너무 와 겁이 났다. 산지는 흔한 일이지만, 서울은 수십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기상이변이라고 뉴스에서 머리기사로 다룰 정도였다. 사흘 후에 막내 시누이의 결혼식이 껴있어 시댁은 잔치 음식 장만하느라 정신없는데, 혼삿날 끼고 무슨 난리라며 시어머니는 못마땅해했다. 대문을 열고 배웅하던 시모의 근심이 수돗가에 절여 둔 배추 위에 소복하게 쌓였다.

만삭이 되었음에도 몸이 워낙 허약해 주변에서 임신한 줄 모를 정도였다. 제왕절개 수술하고 회복실에서 깨어났을 때 아이는 인큐베이터에 있었다. 그렇게 아기집에서 나오고 싶어 볶아치더니 막상 세상에 나와서는 스스로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워했다. 없는 살림에 비보험 인큐베이터라니, 시모의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게다가 고추까지 떼 놓고 나왔다며 한동안 서운한 마음으로 돌아앉으셨다.

37주 미만이거나 2.5kg 미만의 저체중아를 ‘이른둥이’라 한다. 우리 애는 2kg도 채 안 되었다. 엄마 뱃속에서 충분한 시간을 보내지 못한 아이는 솜뭉치처럼 가벼운데다가 피부는 아주 얇아 혈관이 다 들여다보일 정도로 투명했다. 기도의 응답이라도 하려던 것일까. 잔설 덮인 검불 더미 속에서 ‘움’을 틔우고 ‘싹’을 내려 애쓰는 푸나무처럼 아이는 인큐베이터 씨방을 깨고 나오려 조금씩 꼼지락거렸다. 눈 오는 날 태어났다고 어느 날부턴가 시어머니는 ‘백설이’라는 동화 한 편을 각색해 공주인 듯 축복하였다. 좋은 말 예쁜 말로 쓰다듬고 보듬고 애지중지 키웠더니 아무도 이른둥이인 걸 모를 정도로 딸애는 탐스럽게 꽃을 피웠다. 태몽은 작약이었다. 커다란 나무에 웬 작약인가 싶어 제일 큰 꽃 하나를 땄던 꿈이었다. ‘작芍’이 함박꽃을 의미하는 한자인 걸 알고는 얼마나 성질이 급했으면 함박눈(꽃)으로 왔냐며 우리끼리 태몽의 의미를 확대해석하곤 했었다. 딸아이의 인생에 어떤 대풍大豊이 이뤄질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기에, 복스럽고 좋은 징조를 품고 내리는 눈이라면 그것은 첫눈처럼 기념비적인 일이리라.

날(日) 잡은 날에 눈이나 비가 오면 사람들은 덕담으로 좋은 말을 해준다. 시집가는 날 비 오면 잘 산대. 이사 가는 날 눈 오면 부자 된대. 상서로운 의미를 상기시켜 궂은 날씨 때문에 상심했을 이에게 전하는 위로의 덕담이란 걸 나는 안다.

최근 몇 년간은 이상고온으로 눈을 거의 볼 수 없을 정도로 겨울 가뭄이 심했다. 아직 꽃샘추위가 남았으니 대지의 젖가슴을 물고 돋아날 새싹을 위해 진눈깨비라도 한 번 기다려 봐야 할까. 기분 탓인지, 봄 마중을 나갔다가 돌아와 보니 매화나무 분재에서 꽃망울이 움찔거리는 듯싶다. 더딘 성장을 하는 아픈 녀석이 겨울을 버텨내 준 것이, 그저 기특하기만 하다. 한데서 자도 얼어 죽지 않을 나무가 3년 전 우리 집에 올 때는 아무래도 오래 못 살 것 같았다. 분재원 원장에게 맡겨 발톱을 자르고 곪은 부위를 긁어내고 영양수액을 맞혔더니 그나마 하얀 이가 몇 개 돋았다. 자기가 사랑받는 존재인지 천덕꾸러기인지 아는 모양이다. 종일 볕이 드는 좋은 거실은 아니지만, 집 안으로 잠깐 찾아드는 햇살이라도 먹이려면 화분을 옮겨야 한다. 의붓자식처럼 키워도 병들지 않고 물만 먹고 잘 사는 꽃들이 있는가 하면, 사랑을 다 줘도 마음을 안 주는 화초도 있다. 고민 보따리 안고 왔다가 풀어 놓지도 못하고 간 자식놈을 세상 속으로 등 떠밀어 보낸 내가 조그만 화분 하나에 애착을 보이고 햇살 부스러기라도 주워 먹이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 아이러니다.

놀이터가 훤히 내다보이는 창가에서 햇볕을 쬐다가, 이리저리 볕 따라 화분을 옮기다가 그 따스함에 꽃망울 하나가 툭 터지고 말았다. 아직은 만화방창한 시절이 아님에도 이른둥이 매화가 종일토록 마음에서 벙긋거린다.

<에세이스트 2024.11-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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