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백한 그림자
곽지원
어떤 영화는 자꾸만 생각이 난다. 머릿속에서 떨쳐 버리기가 힘들다. 연기와 대본, 연출까지, 삼박자가 더할 나위 없이 조화롭고 그저 아름다운 영화. OST로 나온 노래 ‘A Whiter Shade of Pale’ (프로콜
하럼, 1967년)도 무한 반복해서 듣는다. 그래서 일주일 만에 또 보러 간다.
사울과 실비아는 다른 이유로 상처받은 영혼이다. 실비아는 13년째 AA(알코올
중독자 모임)에 나가며 술을 끊고 사는 싱글 맘이고, 사울은
아내가 죽은 후 조기 치매 (dementia)에 걸려 독립적인 생활이 불가능하다.
실비아는 여동생 올리비아와 함께 고등학교 동창
모임에 갔지만, 와인도 못 마시고 보고 싶던 친구도 안 나와서 재미가 없다. 다들 춤추러 나간 사이, 한 남자가 옆자리에 앉으며 말없이 상체를
그녀 쪽으로 숙인다. 소름 끼치는 순간이다. 그녀는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나 전철역으로 향한다. 그런데 이 수상한 남자, 계속
그녀를 따라온다. 심지어 집 앞까지도! 다른 영화 같으면
소리를 지르거나, 죽자사자 도망 치거나, 왜 따라오느냐고
따지기라도 할 텐데, 이 영화는 다르다. 이렇게 대사를 아끼는데도
전혀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숨을 죽이고 보게 만든다.
비까지 내리는 밤, 사울은 실비아의 집 앞에서 불편한 잠을 잔다. 다음날 아침, 실비아는 그의 지갑에서 동생 아이작의 명함을 찾아내 연락한다. 그렇게
사울과 실비아의 인연이 시작된다.
오랫동안 과거의 상처를 혼자서 끌어안고 살아온
두 사람. 외로운 사람들이 서로를 발견했다. 실비아는 사울
같은 사람을 돌보는 전문가다. 적어도 겉으로 볼 때는 그렇다. 하지만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오히려 돌봄이 필요한 사람은 사울이 아니라 실비아로 드러난다.
사울은 기억이 오락가락하기 때문에, 말도 많이 하지 않는다. 하지만 말이 필요 없는 위로, 그냥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사울이다. 돌보는 사람과 보살핌을 받는 사람을 가르는 경계가 얼마나 모호한지, 이 영화가 보여 준다. 상자를, 테두리를
벗어나서 생각하라고 일깨운다. 상처가 있고 부족한 사람도, 서로
돌보고 위로할 수 있다.
사소한 장면,
사소한 대사지만, 많은 것을 보여준다. 실비아가
사울을 돌보는 동안, 두 사람은 집에서 영화를 자주 본다. 영화를
보며 눈물도 흘리는 실비아. 알고 보니 사울은 치매 때문인지 영화의 줄거리를 따라가는 것도, 몰입하는 것도 벅차다. 그렇지만 실비아가 영화를 좋아하니까, 옆에 같이 있어준다. 이런 게 배려이고 사랑 아닐까?
22년에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후 첫 번째 작품으로 이런 저 예산 영화를 선택한 제시카 차스테인의 용기와 곧은 줏대가 참 아름답다.
“우리
영화는 ‘트레일러’도 없고,
헤어와 의상도 배우 본인이 직접 해결해야 하는데, 괜찮겠어요?”
첫
미팅에서 이렇게 말한 미셸 프랑코 감독에게 차스테인은 “아무 문제없다.”라고
호쾌하게 답하고, 오래 전부터 함께 연기하고 싶었던 피터 사스가드를 상대역으로 추천했다. 사스가드는 이 영화로 베니스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두 배우가
꼭 한 번 작업해 보고 싶었다고 입을 모은 프랑코 감독의 흠잡을 데 없는 대본과 정교한 연출로 탄생한 영화 “메모리(Memory)”.
개봉관도 적고 상영시간이 안 좋은데도, 부지런을 떨며 멀리 움직여 두 번이나 보러 간 나 자신을 칭찬한다. 사울과
실비아가 서로에게 다가가는 과정을 큰 스크린으로 보며, 내 안에 숨어 있는 곪은 기억과 상처가 어느
정도 치유되었다. 이런 게 영화의 힘, 예술의 힘이 아닐까. 이 영화를 관통하는 노래 제목 ‘창백한 그림자’가, ‘창백해지는, 희미해지는 상처’로 읽힌다.
*격월간 [에세이스트] 25년 5/6월호(121호)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