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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명 : 홍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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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능력을 믿지 마세요    
글쓴이 : 홍정현    25-07-22 07:15    조회 : 1,208

 

, 맞다. 내겐 초능력이 있었지.”

꿈에서 깨달았다. 내가 초능력자라는 사실을. 그것은 지갑 없이 붕어빵 노점상 앞에서 군침만 흘리고 있다가, 갑자기 , 맞다, 파우치 안에 비상용 만원 지폐가 있었지라고 떠올린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이렇게 중요한 사실을 깜박하다니, 웃음이 나왔다. 나는 식탁 위에 있는 컵을 가져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다시 앉았다.

나의 초능력은 염력이었다. 접촉하지 않고 사물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 영화처럼 그냥 가만히 생각만으로 되는 건 아니고 물체를 향해 손을 움직여야 가능했다. 스파이더맨의 손에서 거미줄이 나와 멀리 있는 것을 포박하듯이 내 손바닥에서 힘이 작용해 떨어져 있는 물건을 움직이게 했다. 물리학의 언어로는 비접촉력’, 문학의 언어로는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이라고 할까? 컵을 가져오기 위해 오른팔을 들어 손바닥을 펼쳤다. 그리고 의식을 집중했다. 컵이 스르르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쉬운 일이었다.

 

새벽에 눈을 떴다. 또 같은 꿈을 꾸었다. 멀리 있어 닿지 않는 무언가를 움직이게 하는 꿈. 꿈은 늘 생생했다. 손에는 그때의 감각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이것은 무언가의 암시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손바닥이 다시 꿀렁거리는 듯했다. 화들짝 잠이 깨서 일어나 앉았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테이블 위에 있는 책을 발견하고 손을 뻗어 보았다. 책과 손 사이의 간격은 약 1m 정도. 꿈에서 한 것처럼 응차하고 손에 힘을 주었다. 진지하게, 매우 진지하게! 하지만 책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역시 그냥 꿈인 걸까? 손바닥엔 여진처럼 찌릿한 감각이 계속 남아있었다. 그 후에도 나는 홀린 듯 가끔 손을 뻗어 염력을 시도했다. 실없이 말이다. 엉뚱하지만 진지하게! 그러나 무엇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날도 뜬금없이 식탁 위 접시를 향해 팔을 들어 손바닥을 쫙 펼쳤다. 나의 의지가 손바닥을 통해 공간을 흔들어 진동할 수 있도록 정신을 모았다. 접시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저릿한 손의 감각을 느끼며 다시 한번 집중했다. 접시를 노려보는 내 미간에 주름이 과하게 짙어지려는 찰나, 무언가 조용히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빵가루였다.

 

아래아한글 10포인트 글자의 이응크기 정도로 작고 가벼운 빵가루. 나는 놀라 움찔했지만, 심호흡을 내뱉으며 떨려오는 심장의 요동을 가라앉혔다.

나이란 거저먹는 것이 아니다. 오십몇 년 살아온 세월이 알려준 것 중 하나가, 낯선 것(사람이든 물건이든 현상이든)에 대해서는 일단 판단을 보류하고 천천히 살펴봐야 한다는 것. 그리고 나는 1급 정교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과학 교사 출신이 아닌가. 빵가루가 내 손의 작용으로 움직였다고 보기에 주변에 의심이 가는 것들이 많았다. 내 입김이나 콧김 또는 창틀이나 문틈에서 불어온 가벼운 바람이 빵가루를 건드렸을 수도 있다. 대학 실험 시간에 나는 주로 매점에서 간식을 사 오는 역할만 했지만, 그래도 실험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 안다. 변인 통제. 빵가루를 움직이게 한 원인이 무엇인지 과학적으로 밝혀내기 위해서는 다른 변인들은 제거해야 했다. 나는 이런저런 것들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여러 번 다시 시도했다. 그리고 마침내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실험 결과: 식탁 위 빵가루는 홍 모 씨의 손바닥에서 나왔으리라 추측되는 힘의 작용으로 운동상태가 변했다.

 

나는 진짜 염력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너무나도 하찮았다. 하찮은 빵가루, 하찮은 먼지, 하찮은 먼지다듬이(벌레), 하찮은 속눈썹(긴 머리카락도 버거웠다), 작아서 하찮은 모래알, 하찮지만 박멸이 힘든 유령개미(보통 개미보다 매우 작음) 등만 옮길 수 있었다. 심히 하찮아서 이것을 표현할 때는 반드시 아주, 몹시, 너무, 극히, 무지, 같은 부사를 대동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몹시 초라한 재주였지만, 그렇다고 아예 무용한 건 아니었다. 옷에 붙은 먼지를 제거할 때, 이에 낀 고춧가루를 빼낼 때, 눈에 들어간 눈썹을 꺼낼 때, 음식에 후춧가루가 너무 많이 뿌려졌을 때(물론 하나씩 제거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마루 틈 사이로 숨어드는 먼지다듬이를 없앨 때, 손가락에 박힌 미세한 가시를 뺄 때 등등 유용했다.

특히 윗집에서 내려온 유령개미를 해충관리업체 기사님이 설치한 약으로 유인할 때는 정말 짜릿했다. 유령개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 집개미와 달리 먹이가 근처에 있어도 쉽게 찾지 못했고, 획일적인 개미 행렬도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꼭 일탈 개미들이 발생했다. 나는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개미를 해충제를 향한 대열로 강제 복귀시켰다. 내 힘은 상당히 보잘것없지만, 개미에겐 허리케인 버금가는 위력으로 작용했다.

 

매우 미미하나 이것도 놀랄만한 재능이기에 남들에게 자랑하며 우쭐거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망설여졌다. 그래도 남편은 동거인이니 알아야 하지 않을까 싶어 슬쩍 이야기를 꺼내 봤는데 그는 휴대전화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그거 어디선가 바람이 들어와서 그런 거야라고 대꾸했다. 워낙 내가 이상한 말과 행동을 자주 해서 그런지, 뜬금없는 이야기에 놀란 기색도 없었다. 역시 알리지 않는 게 맞았다. 혹 관심을 가지고 믿어주는 이가 있다고 해도, 그래서 어쩌겠는가? 왠지 상황이 더 웃겨질 게 뻔했다. 웃음거리가 되겠지. 그냥 입을 꾹 닫을 수밖에.

 

이렇게 나는 아주 앙증맞지만, 비밀스러운 초능력자가 되었다. 이건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다.


『수필과 비평』2025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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