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붉은 닻」을 끝으로 『여수의 사랑』에 실린 여섯 편의 단편을 모두 읽었습니다. 이십대 한강이 쓴 이 소설을 읽으며 지난해 가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을 때 한림원의 평가가 생각났습니다. 한림원은 한강 작가의 작품이 역사적 트라우마와 인간 삶의 연약함을 강렬한 시적 산문으로 표현했다고 했습니다.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와 같은 최근 대표작에 나타나는 작가의 고민과 감정의 결이 이미 삼십여 년 전 『여수의 사랑』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다만 당시에는 그 시선이 가족과 개인의 상실에 머물렀다면, 이후 점차 역사의 아픔을 지닌 이들로까지 확대되어 갑니다.
여섯 편 모두 가족을 잃고 가난과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입니다. 처절하고 암담한 장면들이 이어지지만, 인물들은 끝까지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려는 의지를 보여줍니다. 작가가 단순히 상처를 드러내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안에서 꺼지지 않는 희망의 불씨를 함께 보여주고자 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작품 속 인물들의 대화와 배경묘사를 통해 그 안에 깃든 작가의 의도를 헤아려봅니다.
「붉은 닻」은 제목부터 강한 상징성을 지닌 작품입니다. 199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작가가 샘터 직원으로 근무하던 시절 인천 을왕리 바닷가에서 모래펄에 묻힌 녹슨 닻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작품의 중심에는 아버지의 부재를 견뎌내는 세 가족, 어머니와 두 형제 동식, 동영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붉은 닻은 상처 입은 가족의 외로운 영혼을 비유하는 듯합니다.
『여수의 사랑』에 등장하는 아버지들은 대체로 술에 의지하며 무책임한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이 작품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식은 아버지를 ‘발이 없는 사람’으로 기억합니다. 현실에 발을 딛지 못하고 표류하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가족끼리 모처럼 소풍 가던 날, 아버지의 두 발은 또렷하게 동식이의 머릿속에 남아있습니다. 그 기억은 환영이 되어 동식을 괴롭히고, 제대 후 돌아온 동영에게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는 것도 그가 아버지를 닮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영이가 난로 연통을 고치고, 어머니가 준비한 도시락을 들고 바닷가로 향하는 소풍에서 가족은 서서히 상처를 치유해 나갑니다. 동식과 동영은 서로에게 묻습니다.
“왜 넌 변하지 않았냐.” “형은 왜 아팠어?” “왜 술을 마셨어.”
(⸀붉은 닻」 문학과 지성사, 299~230면)
동식은 아버지의 실종 이후 술에 의지하다 간경변을 앓았던 적이 있습니다. 작가는 한 가정에서 아버지가 지닌 의미와 그 부재가 남긴 상흔을 세심하게 담아냅니다.
결국 「붉은 닻」은 가족의 상실을 응시하면서도 그 고통을 조금씩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이 작품을 읽으며 이십대 한강의 시선과 마음을 그려볼 수 있었습니다. 그 시절 작가가 응시한 세계를 따라가며 오늘 다시 한강 문학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