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저녁이 저물 때』의 저자 예니 에르펜베크(1967- )는 동베를린 출생이다.
작가는 작년 11월 25일 서울 은평구가 주관하는 제5회 ‘이호철통일로문학상’ 본상을 수상했다. 이 상은 분단 문학의 대표 문인으로 꼽히는 이호철(1932-2016) 소설가를 기려 2017년 서울 은평구가 제정했다. 수상자는 언어나 국적에 상관없이 현재 활동 중인 생존자를 대상으로 전 지구적 차원에서 일어나고 있는 분쟁이나 젠더, 난민, 인종, 차별, 폭력, 전쟁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를 문학적 실천으로 극복하고자 노력하는 작가를 선정한다고 한다.
독일 역사 속 여성의 삶을 보여주는 『모든 저녁이 저물 때』는 “만약 그때 죽지 않았다면”이라는 네 번의 가정에서 다섯 편의 이야기가 이루어진다. 유대인 엄마와 가톨릭 신자인 아빠 사이에서 1902년 태어난 주인공은 생후 8개월 되던 무렵 유아 돌연사로 최초의 죽음을 맞는다. 만약에 이때 죽지 않았다면(제1편), 주인공은 어떤 삶을 살게 되었을까를 상상한다. 이 주인공이 젊은 여인으로 성장하여 제1차 세계대전을 겪고 사랑하다가 죽는데 이때 죽지 않았다면(제2편), 주인공은 공산주의자가 되어 결혼하고 모스크바로 이주 스탈린 치하에서 체포되어 수용소에서 죽는데 이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면(제3편), 전후에 동독으로 돌아가 작가로 명성을 날리며 예순이 되기 전 계단에서 굴러 실족사하는데 이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면(제4편), 동서독은 통일되고(1990) 주인공은 아흔의 나이(1992) 생일 바로 다음 날 치매 노인을 위한 양로원에서 죽는다(제5편).
작가는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만약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 하고 묻는다. 우리 인생에서도 여러 차례 중요한 순간에 선택해야 할 일들이 있기 마련이며, 이 선택이 어떨 때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고 다행인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작가는 1999년에 데뷔하였고 이 책의 원본 간행은 2012년이며, 배수아 작가에 의한 번역본 출간은 2018년이다. 이 작가와 작품에 대한 참고 자료는 거의 없으며 유일하게 서울대 독문학과의 <페미니즘과 역사의 재구성- 예니 에르펜베크 소설 연구> 문학석사 학위 논문(오은교, 2018, 총 89쪽)이 있다. 이 논문은 작가의 여러 소설 작품에 대한 연구이며 『모든 저녁이 저물 때』에 대한 설명이 일부 들어 있다. 주요 부분을 소개하면,
‘할머니-어머니-딸은 유대계 여성으로서 겪는 이중의 고통을 함께 경험하는 처지임에도 서로에게 점처럼 다가서지 못하고 여성 세대들 간의 연결은 지속적으로 와해된다.’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거르지 않고 살다가 비정하고 잔인하게 변해가는 여성들의 삶에 대한 통찰을 통해 정치적 주체로 각성해 나간다.’
‘이 어머니들이 보이는 잔인함과 억척스러움은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여성들이 삶의 과정 속에서 얻게 된 자질이지 결코 선천적이거나 필연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주인공이 작가가 되는 것은 그녀가 일방적으로 주어지기만 하는 언어와 이미지들의 표상들을 거부하고 스스로의 언어로 세계를 이해하기 위함이다.’
‘죽음의 문턱에 이른 그녀가 오래전에 소식이 끊겨버린 어머니의 환영을 보는 대목은 어머니를 이해하고 싶었던 딸의 소망을 드러내 준다.’
‘작가는 그녀가 보여주는 강인한 생명력과 생존 이후의 생이 선사하는 여러 가능성을 “부활” 모티브를 통해 강조함으로써 소설을 유대계 혈통의 비참한 여성 수난 서사가 아닌 살아남기 위해 분투했던 한 여성의 주체적 실존에 관한 이야기로 정립시킨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반유대주의, 히틀러와 나치즘, 제2차 세계대전, 사회주의 혁명과 공산주의 연방, 독일 통일 등은 유럽을 뒤흔든 거대한 흐름이었다. 이러한 조류에 개인의 인권과 존엄은 무시되기 일수였을 것이고, 더욱이 유대인이며 가련한 주인공 여성의 운명은 바람 앞에 촛불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격동의 시대를 거치며 한 여인이 네 번이나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면 그 후 어떻게 살았을까 하는 가정법을 적용한 독특한 소설인데 이러한 형식은 처음 접해 본다.
작가는 탄탄한 구성력과 시적 언어를 통해 인간의 삶과 죽음을 돌아보게 한다. 작가가 보여주는 맹렬한 서사가 급격한 상승곡선을 그릴 때 우리는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 작가가 전해주는 뜨거운 감정과 묵직하고 흡인력 있는 문체, 바로 그것이 우리가 작가의 작품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유성호 교수). 유 교수님이 발췌해 주신 대표적 문장들은
‘신이 주셨고 신이 거두어 갔다.'- (첫 문장)
’한 사람이 죽은 하루가 저문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저녁이 저무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지금 막 지나온 순간이 아니라 모든 순간인 것이다.‘
’그러니까 죽음은 한 순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일생에 걸친 전선(戰線) 같은 것일까?‘
국내에 간행된 이 작가의 소설을 소개한다.
『늙은 아이 이야기』(2001)
『그 여자의 질투』(2004)
『아트로파 벨라돈나』(2004)
『그곳에 집이 있었을까』(2010)
* 임길순 작가님의 한국문협 제14회 서울시문학상 수상을 축하했다.
“안다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논어)”
<명작읽기반>의 6개월간 월별 읽기 교재
7월 7일(목) 『필경사 바틀비』 멜빌
8월 4일(목) 『백 년의 고독』 마르케스
9월 1일(목) 『모든 저녁이 저물 때』 에르펜베크
10월 6일(목) 『소년이 온다』 한강
11월 3일(목)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쿤데라
12월 1일(목) 『그리스인 조르바』 카잔차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