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반 여름학기가 잘 끝났습니다. 기상악화로 인해 원래 종강 일보다 일주일이 연기되다 보니 부득이 출석하지 못한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여느 날 못지않게 강의실 분위기는 수강생들의 열의로 가득 찼습니다. 감사합니다.
지난 9주차에는 개인적 체험의 소설화라는 주제로 몇몇 작품을 살펴보았습니다. 10주차 강의에서도 작품 분석보다는 작가들이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어떻게 소설화하고 있는가를 이어서 살펴보았습니다. 작가들이 자신의 개인적 체험들을 어떻게 소설로 쓰게 되었을까 상상하고 생각해 보는 과정에서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개인적 체험들을 어떻게 소설로 쓸 것인가에 대한 나름대로의 방향성 같은 것들을 배우는 시간이었습니다.
■ 정용준 「떠떠떠 떠」
이 작품은 말더듬 장애를 지니고 있는 작가가 자신의 결함을 어떤 방식으로 소설화하는가 볼 수 있는 사례였습니다. 말을 더듬는 화자가 남들처럼 잘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말해야겠다는 열망을 갖게 되는 것이 이 소설의 플롯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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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랫동안 장애라는 단어에 대해 고민해왔어. 무엇인가 가로막고 혹은 결핍되어 불안하게 절룩거리는 단어. 늘 내 자신에게 묻곤 했지. 내게 장애가 있나? 단어가 입술 사이를 가로막아 산산조각이 난 언어. 끝없이 누수 되는 호흡, 치아 사이사이로 모래처럼 빠져나가는 말들. 나는 분명 장애가 있지. 타인의 장애를 이해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장애는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오직 확인만 가능할 뿐이지. 잘려져 나가거나 뽑혀져 없어져야만 비로소 알아볼 수 있는 불구.
내가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성격이 급한 것도, 말이 꼬여서도 아니야. 자신감이 없기 때문도 아니고 어휘력이 떨어져 단어 선택을 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지. 내게 말은 붕괴된 조직이고 소멸된 유적이며 퇴화된 신경과도 같아. 혀끝에 달라붙어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 말은 이끼와도 같고 증발하고 흔적만 남은 얼룩과도 같지. |
: 자신의 장애를 인간의 역사에서 유고한 무엇인가로 보게 되는 관점의 전환이 돋보이는 문장이다. 소설에서 인물의 생각이 어떻게 변해가는 가는 아주 중요한 문제다. 인간의 속내(진심)는 서브텍스트를 말한다. 겉으로 진심을 드러낼 수도 있고 은폐할 수도 있다. 은폐되어 있더라도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순간이 있는데 서브텍스트가 표면 텍스트로 찢고 나오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플롯이 약화되고 인물들이 처해있는 아이러니가 강조됐다라면 플롯은 사라지고 인물만 남는가 하면 그게 아니다. 결국 전통적인 의미의 플롯이 사라졌다기보다는 내면화됐다는 것이다. 플롯이 내면화되었다는 것은 우리 마음의 변화를 뜻한다. 인과관계가 분명하고 사건과 사건의 관계가 표현된 것은 고전적인 플롯이다. 현대 소설에서는 표면화된 사건이 줄어든 만큼 인물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변화가 아주 중요하게 되고 그 마음의 변화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읽을 수 있을 때에 서브텍스트를 보다 더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게 된다는 관점에서 이 인물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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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떴을 때 그녀의 혀가 꼭 다문 내 입술을 천천히 열고 있었다. 나는 다시 눈을 꾹 감으며 입술을 열었다. 그녀의 혀는 어항 속 물고기처럼 내 안에서 움직였다. 부드럽고 느린 움직임으로 맴돌다가 갑자기 빠르게 수면까지 떠올랐다 바닥까지 가라앉았다.
세상에 어떻게 너는 이 멋진 혀로 아무 말도 안 할 수가 있었던 거니. |
: 지난주에 다뤘던 데이비드 밴의 소설에서도 어항이 중요한 메타포의 기능을 했는데 여기서도 등장한다. 어항이라는 게 어떤 점에서는 아주 제한되고 가둬진 세계이다. 단절되고 분리되어 있는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어항 속 물고기들이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관찰하며 물고기들을 자기와 동일시하게 되는 흥미로운 장면이다. 두 작가는 사물을 볼 때도 그냥 보지 않고 자신이 처해 있는 사항을 즉각적으로 이입을 시키면서 보기 때문에 아마도 그런 대상들에서 비슷한 의미를 읽어내는 게 아닐까 싶다.
작가란 어떤 존재일까? 그런 것들을 찾아내는 사람. 자기 자신이 어항을 보면서 나를 갇혀있는 존재라고 느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저 어항을 보면서 그 세계가 분리되고 단절되고 갇혀 있는 세계를 뜻할 수 있음을 알아보는 사람을 작가라고 할 수 있다.
1. 이 소설은 어떤 점에서는 전형적인 멜로드라마라 할 수 있다. 진부하고 감상적인 스토리에 지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소설이라고 한다면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문장이다. 어디서 비롯되었나 보면 자신의 결핍을 충분히 인식하고 알고 있었기에, 무엇을 말하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를 찾아 표현법을 간절하게 찾아낸 것이다. 단순히 기교적인 문제가 아니라 진짜 삶의 문제이자 왜 소설을 써야하는가 근원적인 문학적 충동의 문제로 이 작가에게 다가왔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다른 사람들보다 천재성이 있다기보다는 누구보다 문장에 대해 예민하고 섬세하게 대했다. 우리가 이런 문장을 구사하려면 그만큼 예민하고 섬세하게 문장에 다가가야 한다.
젊은 친구들의 경우 소설을 쓸 때 문장에 대해 소홀해지는데 그 까닭은 하고 싶은 말이 많기 때문이다. 너무도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나머지 이야기 자체가 지닌 무게감, 진실함, 중대함 등에 의미를 위임한다. 그러다보니까 그것을 드러내는 실질적인 방식인 문장에 대해 소홀하게 된다. 정용준 작가가 이십 대에 이런 좋은 문장을 쓸 수 있었다는 건 남들보다 문장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는 것이다.
2. 각자마다 마음 안에 해소되지 않은 것들을 결핍이나 결락으로 놔두지 않고 무언가 충만한 것으로 만들어내려면 첫 번째로 인식하고 있는 결핍을 그대로 보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자꾸 다른 비유를 찾아 에둘러가게 되면, 아직 상처의 고름을 빼내지 않은 채 봉합한 것과 유사하게 된다. 그걸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으면 한평생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 왜 내가 소설을 써야 하는지 일차적인 문제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 다른 세계로 뻗어나가지 못한다. 그런데 정용준 작가처럼 처음부터 말더듬을 직시하고 소설화하면 이 세계가 확장된다. 말더듬이라는 것에 갇혀 있지 않고 소설의 세계가 말의 문제, 언어의 문제로 확장되어 간다. 이 작가가 말더듬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그런 세계로 나아가지 않았나 싶다.
자신의 개인적 체험이나 상황, 조건들을 객관화한다고 다른 걸로 대체를 하는 게 문학적이야라고 생각하게 되면, 자꾸만 거리를 두는데 신경을 쓰게 되고 정수를 환기시키는 주변적인 것들을 어떻게 끌어들일까만 생각하게 된다. 그 과정은 뒤집어져야 한다. 처음부터 직시하고 그것을 다루다보면 점점 세계가 넓어져서 훗날 작가로서 완숙하게 되면 전혀 말더듬에 대해 말하지 않더라도 말더듬에 대해서 훌륭하게 말하게 되는 자기 소설 세계의 확장이 이뤄진다. 내 상처, 내 경험, 내 기억을 객관화하려지 말고 충분히 주관화하고 주관화하고 소유하고 소유해서 자신의 것들로 만들어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