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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강, 발터 벤야민의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5월 11일 용산반    
글쓴이 : 차미영    26-05-16 17:13    조회 : 11

플라톤의 모방과 벤야민의 유사성

 

‘Ex nihilo nihil fit’(에서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는다)는 세계와 사물의 생성에 대한 오래된 물음에서 비롯된 명제입니다. 예술도 이 물음과 만납니다. 순수 창작은 가능한가. 창작이란 이미 있는 세계가 예술가의 시선과 형식으로 다시 태어나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여기에서 미메시스’(mimesis), 곧 모방의 문제가 시작됩니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모방은 진리에서 멀어지는 과정입니다. 참된 실재는 이데아의 세계에 있고, 현실 세계는 그 이데아를 본뜬 세계입니다. 예술은 다시 그 현실을 본뜨기 때문에, 플라톤에게 예술은 진리에서 두 번 멀어진 이미지가 됩니다. 국가10권에서 플라톤은 침대의 이데아, 장인이 만든 침대, 화가가 그린 침대를 구분합니다. 화가의 침대는 침대의 본질이 아니라 겉모습을 옮긴 것일 뿐입니다. 따라서 플라톤에게 미메시스는 참된 앎에 이르는 길이라기보다 감각적 외양에 붙들리는 방식입니다. 이 때문에 플라톤은 진리를 알지 못한 채 감정을 자극하는 시를 이상국가에서 배제하려는 시인추방론으로 나아갑니다.

 

반면 벤야민에게 미메시스는 대상을 그대로 베끼는 일이 아니라, 말소리와 몸짓, 기억 속에서 사물들 사이의 닮음을 찾아내고 새롭게 연결하는 능력입니다.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무메렐렌에서 어린 벤야민은 Kupferstich(동판화)라는 말을 Kopf-verstich(머리 찌르기)로 받아들이고, 의자 밑에서 머리를 내미는 몸짓으로 연결합니다. 이 장면은 언어가 뜻으로 이해되기 전에 먼저 소리와 몸짓으로 체험되는 순간을 보여줍니다. 말소리와 몸짓 사이에 닮음을 만들어 내는 이 과정이 바로 벤야민이 말한 미메시스의 핵심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이 비감각적 유사성입니다. 이를테면 별자리는 별들이 실제 사자나 전갈을 닮아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흩어진 별들에 이름과 이야기를 부여하며 그 사이의 관계를 만들어냅니다. 벤야민에게 언어는 감각적으로 닮지 않은 것들 사이에도 의미의 관계를 만들고, 그 관계 속에서 비감각적 유사성이 성립합니다.

벤야민이 카프카의 어린 시절 사진을 떠올리는 대목(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82)은 사진 속 타자에게서 자기 유년의 감각을 발견하는 미메시스적 순간을 보여줍니다. 사진은 기억을 불러오는 매체이자, 벤야민이 아우라의 변화를 사유하는 통로가 됩니다. 벤야민에게 아우라는 눈앞에 있어도 먼 것으로 남는, 원작만의 유일한 현존감입니다. 그러나 사진과 영화 같은 기술복제는 예술작품을 복제 가능한 이미지로 바꾸며 원작의 지금-여기를 약화시킵니다.

플라톤에게 모방이 진리에서 멀어지는 문제였다면, 벤야민에게 기술복제 시대의 모방은 인간의 지각 방식과 예술 경험 자체가 변화하는 사건입니다. 이렇게 벤야민의 미메시스 이론은 언어와 기억의 문제에서 기술과 예술의 지각 문제로 이어집니다


차미영   26-05-16 17:22
    
늘 성실하게 수업후기 올려주시는 신재우 선생님 대신하여 제가 벤야민의 미메시스 이론을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한 대목 연결하여 썼습니다. 벤야민 수업은 다음 시간 종강합니다. 18일 월요일은 저희 용산반에게 의미있는 아주 특별한 시간일 겁니다.  이제 저희 용산반은 여름학기 6월부터 강남 롯데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새롭게 둥지를 트려고 합니다. 그동안 정들었던 장소를 떠나 새로운 곳에서 더 알찬 인문학 수업이 변함없이 이어지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