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는 예복을 갖추어 입는 일과 같습니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결혼식에 트레닝복을 입고 가도 됩니다.
그러나 나 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남을 위해서도 우리는 예복을 입어야지요.
수필은 일기가 아닙니다.
나만을 위한 글인 일기는 형식을 갖추지 않아도 됩니다.
수필은 독자의 눈을 즐겁게 해 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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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은 자신의 경험을 쓰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경험에서 그치면 안되고 고민을 많이 하여 발견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글감이 될 수 있지요.
글감이 되는 경험을 찾아내는 것이 재주입니다.
우리가 경험한 것 중 진정한 글감이 될 수 있는 것은 1 %밖에 안됩니다.
글감을 발견했다면 이미 80 %는 성취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경험한 이야기를 아무런 굴절과 취사선택과 여과 없이 뱉어내는 일기를
수필이라고 쓰는 행위를 그만두는 것이 가장 큰 숙제입니다.
벌써 스승님이 수백 번 강조하신 말씀이지만
우리는 그 안타까워하시는 스승님을 바라보며 송구스러워할 뿐
고칠 수 없는 중증의 병을 앓고 있나 봅니다.
글쟁이는 수학자가 되어야 합니다.
계산을 잘해야 하니까요.
수필에는 무형식의 형식이 있습니다.
엄연히 형식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아무리 이론을 열심히 들어도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답답함에 가슴이 멍해집니다.
스승님이 주시는 아이템을 받으면 꼭 실천을 해서 구성이 탄탄한 글을 써야겠습니다.
바닷가 폐교에 가면 학생은 하나도 없고 빈 학교만 덩그마니 있습니다.
그러나 학교는 학생이 없어도 운영될 수 있지요.
밤이면 연못에 별들이 내려와서 서정시를 씁니다.
풀벌레들은 합창을 하고요.
바닷가의 파도는 박수를 칩니다.
어느 새 자연의 학교로 변했습니다.
여름에는 개구리들이 음악 교사가 되어 연주를 하고
가을에는 귀뚤씨가 자판을 두드리지요.
이렇듯 풍부한 상상력과 뛰어난 감각적 표현이 동반되어야만 재미있는 글이 탄생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재무 교수님의 권두논단인 <시의 부활을 위하여>를 공부했습니다.
왜 시가 읽히지 않을까
외적 요인으로는 매체 환경의 변화를 들 수 있습니다.
인터넷과 휴대전화라는 기술 매체에 중독되어
권태를 일시적으로 배설하는 현대인들은
진중하게 앉아 책을 읽고 사색하는 수고로움을 기피합니다.
내적 요인으로는 소통 불능의 지폐적 언어로 자기들만의 성채 속에 사는
시인들의 시작 태도입니다.
마치 분재를 하듯 언어를 분지르고 비틀고 학대하여
장애어를 만드는 현상이 소통 불능의 시로 이어지는 것이지요.
좋은 시는 자연스런 유로이어야 하며 난해시조차도 독자의 이해에 가 닿아야 합니다.
‘시적 허용’도 조심스럽고 창의적으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독자 또한 시를 이해하기 위해 공부하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스포츠 관전을 위해 스포츠 룰을 알아야 하 듯이 시에 대한 최소한의 룰
즉 이미지, 어조, 비유, 상징 등등 시의 구성요소를 숙지해야 합니다.
왜 시를 읽어야 하는가
일반 독자들은 시에 대한 효용성을 상당히 신뢰하고 있습니다.
시가 나날의 고투에 위로를 줄 수 있고
나아가 정신의 피로에 대한 치유가지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시인들은 과연 어떤 노력들을 기울었는지 자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경험과 정서를 충분히 숙성시킨 연후에야 시작에 임해야 합니다.
추억만으로 아직 충분하지 않다.
추억이 많으면 그것을 잊을 수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추억이 다시 살아날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큰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추억 그 자체만으로는 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추억이 우리의 몸속에서 피가 되고, 시선과 몸짓이 되고,
이름도 없이 우리 자신과 구별되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몹시 드문 시간에 시의 첫마디가
그 추억 가운데에서 머리를 들고 일어서 나오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말테의 수기>> 중에서
우리는 절제를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인내심을 가지고 추억이 우리와 완전히 하나가 되도록
녹아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릴케의 말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하겠습니다.
수필 또한 시와 다를 게 없으니까요.
경험이, 추억이 무르익을 때까지......
시인으로서 꿈꾸는 세상
문학이 사회 변혁의 무기가 될 수 는 없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갈등과 분열로 갈가리 찢긴 불모의 현실을 외면하지 말고
그것에 주의하고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 삶에 최소한의 안전망이 구축된 세상,
사회적 약자가 자신들의 불우한 처지를 자유롭게 발언하고 호소할 수 있는 세상 등등을 위하여
작으나마 관심을 표명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당면한 우리 현실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갖고
자폐의 골방에서 빠져나와 거리와 광장으로 시가 걸어나갈 때
멀리 떠나갔던 독자들이 돌아올 것입니다.
비록 시인들만의 사명은 아니겠지요.
문학을 하는 모든 사람들 나아가 예술을 하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필요한 사명감인 듯하여
긴 글이지만 간추려 보았습니다.
오늘은 목동으로 이사를 가게 된 이은숙님이 뜨끈한 시루떡과 함께
마지막 인사를 하러 오셨습니다.
그동안도 어린 자녀들 육아 문제로 자주 결석을 하였는데
이제 목동반으로 옮기신다니 참 섭섭합니다.
그래도 반만 옮길 뿐 언제나 <<한국산문>>이란 같은 둥지에 있을테니
덜 서운하게 생각하렵니다.
능숙한 글솜씨로 등단을 목전에 둔 은숙님! 항상 건강하세요.
김화순님 또한 사업 때문에 제주도에 서 몇 달을 보내신다네요.
가을 학기에 다시 오신다니 섭섭함은 그리 오래 가지 않을 듯 합니다.
박진숙님은 아드님이 계신 노르웨이에 두 달 머물러 가셔서
역시 가을 학기에 다시 오신다고 합니다.
갑자기 세 분이나 멀리 가신다니 허전한 마음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이름만 들어도 멋질 것 같은 노르웨이에서 아름다운 풍경 듬뿍 맛보시고
역시 그림같은 제주도에서고 힐링 많이 하고 오시기를 바랄께요.
다음 주는 종강 수업 후 소주와 삼겹살 파티를 하기로 했습니다.
허심탄회한 대화가 오갈 식사 시간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