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에서 고정관념은 치명적입니다.
고정관념은 통념, 기계적 인식, 관습적 인식, 자동화된 의식이라고도 합니다.
경계 대상이지요.
익숙한 것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낯설게 하기’를 해야 합니다.
의외의 소재를 가지고 의표를 찍어야 합니다.
이럴 때 감동이 옵니다.
나만의 고유한 경험이 필요한데
이런 경험이 쉽게 오는 것이 아니므로 머리를 써야 합니다.
‘낯설게 하기’의 대표적인 시는 1953년에 서정주가 쓴 ‘국화 옆에서’입니다.
그 전까지 사군자인 매란국죽은 절조의 상징이었고
모든 시인들은 그 이미지만 가지고 쓰면 별 무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서정주는 10대를 소쩍새에
30대를 천둥, 먹구름에
40대를 가을 무서리에 비유해서
시련과 고통이 지불된 후 국화꽃이 피었음을
곧 원숙한 생명이자 성숙한 여성의 미가 탄생되었음을 노래했습니다.
뻔했던 국화의 상징을 다르게 바꾼 것이지요.
진달래 산천/ 신동엽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꽃 펴 있고,
바위 모서리엔
이름 모를 나비 하나
머물고 있었어요
잔디밭엔 장총(長銃)을 버려 던진 채
당신은
잠이 들었죠.
햇빛 맑은 그 옛날
후고구렷적 장수들이
의형제를 묻던,
거기가 바로
그 바위라 하더군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남햇가,
두고 온 마을에선
언제인가, 눈먼 식구들이
굶고 있다고 담배를 말으며
당신은 쓸쓸히 웃었지요.
지까다비 속에 든 누군가의
발목을
과수원 모래밭에선 보고 왔어요.
꽃 살이 튀는 산 허리를 무너
온종일
탄환을 퍼부었지요.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꽃 펴 있고,
바위 그늘 밑엔
얼굴 고운 사람 하나
서늘히 잠들어 있었어요
꽃다운 산골 비행기가
지나다
기관포 쏟아놓고 가버리더군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그리움은 회올려
하늘에 불붙도록.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바람 따신 그 옛날
후고구렷적 장수들이
의형제를 묻던
거기가 바로
그 바위라 하더군요.
잔디밭엔 담배갑 버려 던진 채
당신은 피
흘리고 있었어요
우리는 진달래에 관한 시 하면 김소월의 <진달래 꽃>만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신동엽 시인은 4.19 혁명을 진달래로 노래했습니다.
진달래는 4월에 피며 붉은 색깔 또한 혁명을 상징합니다.
학생과 지식인이 많이 사망한 달도 역시 4월입니다.
묘지 주변에 잔뜩 피어있는 진달래를 보며
시인은 진달래에게 새 이미지를 부여했습니다.
김소월이 슬프지만 슬퍼하지 않겠다는 여인의 반어적 감정을 얘기 했다면
신동엽은 내 나름대로 4.19 혁명의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낯설게 보기에 성공한 것입니다.
내 의미를 부여하세요.
그래야 설득력이 있습니다.
사고의 변화가 바로 창조이며 이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일반 독자는 새로운 것에 거부반응을 보입니다.
익숙한 것을 좋아하지요.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보수적이 됩니다.
그러나 문학예술에서 익숙함은 적입니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않습니다.
수산시장에 가져가는 물고기들에겐 천적 하나를 꼭 넣습니다.
그 천적 덕분에 물고기들이 긴장을 늦추지 않으니까요.
미술가 뒤쌍이 변기를 전시하고 샘물이라고 이름 지었을 때
그는 낯설게 보기에 성공한 셈입니다.
고정관념을 버리면 인생살이가 훨씬 편해집니다.
사유주체와 사유대상이 서로 바꾸어 보는 행위가 시점의 전환입니다.
인간이 오만하여 늘 주체가 되어 함부로 의미 규정을 했을 뿐이지요.
꽃이 웃는다고요?
그건 보는 이의 생각일 뿐입니다.
내가 기쁘면 웃는다고 슬프면 운다고 하지요.
새가 지저귄다고요?
새가 나보고 오지 말라고 짖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나무들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서 피톤치트를 내뿜는데
우리를 반겨서 그런다고 생각하는 것도
우리를 주체로 착각하기 때문이지요.
노자는 “호수에 사는 잉어는 미인이 두려울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눈에나 미인이지 잉어 눈에는 괴물에 불과합니다.
사물의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풍장 5/황동규
까마귀들 날고 떠들며
머리맡에서 서성댈 때
한 눈 팔다가 한 눈 파먹히고
팔 휘둘러 쫓으며 비스듬히 누워
한 눈으로 보는 세상.
고개 숙이고 나무들이 나직이
주고받는 말 들린다.
저녁 바람이 차다고
가을의 한가운데가 방금 지나가고 있다고
가을의 한가운데, 저 외마디 구름장을 뱉어내는
더 작은 구름장,
자지러지며 다시 내 눈을 뱉어낸다
뛰고 날고 참 잘들 논다!
아직도 흥이 남아 있다니!
슬며시 돌아누워 날개 달린 자들에게
나머지 한 눈까지 내어맡길까.
아니면 헌 신발을 머리에 얹고
덩실덩실 춤추며 내려가볼까.
저녁 이슬에 아랫도리 적시고
한쪽 눈으론 웃고 다른 한쪽은 캄캄히 타오르며
맨발로 덩실덩실 내려가볼까
시신이 주체가 되어 말하는 시입니다.
시신의 입장에서 산 자의 세계와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죽음도 삶의 연장, 연속선상에 있다고
삶과 죽음이 동시 진행된다는 동양적 사유가 돋보입니다.
처음부터 시 한 편이 찾아오지 않습니다.
시인이 얻은 발상은 시가 전개되어 나갈 하나의 씨앗 즉
중심 이미지 혹은 중심 은유로 형상화됩니다.
모티브가 시작되면 하나씩 불려 들여 시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지요.
유리창/정 지 용?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린거린다.
열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다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 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백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山)ㅅ새처럼 날아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