옻나무 / 이재무
어릴 적 나는, 토담집 한 귀퉁이
십수 년 우리집 가난과 함께 자라온
옻나무가 무서웠다 살갗만 살짝 스쳐도
온몸에 두드러기가 일던 그 괴괴한 나무의 서늘한 눈빛과
무심코 눈이라도 부딪는 날이면
어김없이 밤마다 진저리치는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어느 해인가
할머니의 가슴앓이로 다리 한짝 잃고도
아버지의 진기 빠진 근력을 위해
팔 한짝 선뜻 내주던 은혜였던 나무
그리고 그 다음해의 늦봄
해수병의 당숙 기어이 속옷으로 쓰러뜨리던
성성한 이파리로
그늘을 넓혀 이십여 평 양지의 마당
삼키어가던 식욕 좋던 그 나무가
어릴 적 나는, 왜 그리 무서운 금기의 나무였는지
지금도 추억 떠올리면 종아리에 소름꽃 핀다
옻타지 않는 이에게 더없이 약되면서
옻타는 사람에겐 더없이 병되던
은혜와 배반의 이파리로 엮어진 나무
그 시퍼런 이중성의 표정이
근엄한 판검사의 얼굴로 덕지덕지 열리는 것을
어느 날 나는, 법정의 방청석에서
오돌오돌 떨며 그러나 똑똑히 보았다
어떤 이에게는 약효가 있는 옻나무가
어떤 이에게는 부작용을 줄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나에게 좋을 수만은 없지요.
양면적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동일한 대상이 누군가에게는 약재가 누군가에게는 독이 됩니다.
사랑이란 상대방의 입장, 처지에 따라 달라져야 합니다.
일방적 사랑은 독 또는 억압이 될 수 있습니다.
단단한 고요 / 이재무
일 년 중 고요의 힘이 세지는 때는
망종(亡種)에서 몸을 빼 소서(小暑) 쪽으로 느리게 걷는 절기의
빨랫줄 바지랑대 그림자의 키가 가장 작아지는 때
한동안 각축하듯 울어대던 매미 울음 뚝 그친 막간
어슬렁대던 개들도 마루 밑으로 기어들어가 오수 즐기고
숫돌 다녀온 왜낫처럼 날 선 햇살 따갑게 내려
축축한 생각의 물기 휘발시켜
백치의 순간에 이르게 하던,
살구씨처럼 단단한,
이제는 어데 먼 데로 귀양 떠나 죽었는지 소식조차 없는
세상이 시끄럽습니다.
고요한 때가 그리워집니다.
도시에서는 온갖 소음들로 고요한 곳을 찾기가 힘이 듭니다.
옛날 시골이 정말 고요했지요.
해가 가장 긴 하지, 제일 뜨거운 시간인 12시에서 2시까지
시골에 있는 모든 사물은 낮잠을 잡니다.
사람을 비롯하여 개, 닭, 매미까지 잠을 청합니다.
이때의 고요함이야말로 살구씨처럼 단단한 고요입니다.
고요라는 관념을 감각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낫을 갈았다는 설명적인 문장 대신 숫돌 다녀온 낫이라고 쓴 표현도 좋습니다.
장독대 / 이재무
이제 다시 그처럼 깨끗한 기도 만날 수 없으리
장독대 위 정한수 담긴 흰대접에서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어둠은 도둑걸음으로 졸졸졸 고여 오다가
흰빛에 닿으면 화들짝 놀라 내빼고는 하였다
어머니는 두 볼에 홍조 띄우고
두 손 가지런히 모아
천지신명께 일구월심 가족의 소원 대신 빌었다
감응한 뒷산 나무들 자지러지게 잔가지를 흔들고
별꽃 서너 송이 고개 끄덕이며 더욱 환하게
웃어 주었다 그런 새벽이면 어김없이 얼어붙은
비탈에 거푸 엎어져 무릎 까진 밤새 울음이 있었다
풀잎들은 잠에서 깨어 부스럭대고
바지런한 개울물 들을 깨우러 가고 있었다
촘촘하게 짜여진 어둠의 천 오래 입은 낡은 옷 되어
툭툭 실밥이 터질 때 야행에 지친 파리한 달빛
맨발로 걸어 들어와 벌컥벌컥 마셨다
광석들 가로지르는 서울행 기차 목 쉰 기적이
달아오른 몸 담궈 오기도 하였고 밤나무의,
그 중 실한 가지가 손 뻗어오기도 했으나
정한수는 줄지 않았다
장독대. 내 생의 뒤뜰에 놓여 있는,
생활이 타서 갈증으로 목이 마를 때
흰빛 내밀어 권하시는,
내 사는 동안 내내 위안이고 지혜이신 어른이시여,
모든 사물에 영혼이 있다는 애니미즘이나 토테미즘을 토대로 쓴 시로
감각적 묘사를 통해 어머니의 가족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별꽃 서너 송이라는 문학적 표현은
기표 중력으로부터 벗어난 표현입니다.
이렇게 문학 표현에서는 언어 약속을 깨야 합니다.
‘비탈에 거푸 엎어져 무릎 까진 밤새 울음이 있었다’는
청각의 시각화로 공감각적 표현입니다.
풀잎들이 잠에서 개어난 부스럭거림은 새벽을 나타냅니다.
촘촘하게 짜여진 어둠은 밤이 깊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도시의 길과 시골길 중 어느 쪽이 더 싱싱할까요?
도시에는 밤에도 불이 켜진 곳이 많아 길은 잠을 충분히 잘 수 없습니다.
그래서 도시의 길은 오래 입은 런닝구처럼 구멍이 나고 지쳐 있지요.
반면 시골길은 바람을 잔뜩 넣은 공처럼 튀어 오릅니다.
가로등이 켜진 곳엔 식물도 성장이 느립니다.
내 일상의 종교 / 이재무
나이가 들면서 무서운 적이 외로움이란 것을 알았을 때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핸드폰에 기록된 여자들
전화번호를 지워버린 일이다 외로움은 사람을 한없이 추하게 만든다
술이 과하면 전화하는 못된 버릇 때문에 살아오면서 얼마나 나는 나를
함부로 드러냈든가 하루에 두 시간 한강변 걷는 것을 생활의 지표로
삼은 것도 건강 때문만은 아니다 한 시대 내 인생의 나침반이었던
전설적인, 위대한 스승께서 사소하고 하찮은 외로움 때문에
자신이 아프게 걸어온 생을 스스로 부정한 것을 목도한 이후
나는 걷는 일에 더욱 열중하였다 외로움은 만인의 병 한가로우면
타락을 꿈꾸는 정신 발광하는 짐승을 몸 안에 가둬
순치시키기 위해 나는 오늘도 한강에 나가 걷는 일에 몰두한다
내 일상의 종교는 걷는 일이다
항구에 배가 너무 오래 정박해 있으면 썩습니다.
사람의 몸 또한 편하면 정신이 썩습니다.
호미는 밭에 있어야지 오래 사용하지 않으면 녹이 습니다.
서양 철학자들은 늘 걸으면서 사색을 했습니다.
정신의 고통은 육체를 힘들게 하면 낫습니다.
오체투지가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문학은 인간의 존재론적, 실존적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입니다.
과학이 규명 못하는 것을 문학, 예술은 해결해줍니다.
꽉찬 교실은 유난히 다양한 먹거리로 더 풍성했습니다.
향긋한 귤을 가져오신 문정혜샘과 정미 총무님,
달콤한 감말랭이를 정성스럽게 만들어 오신 래순샘,
맛있는 빵으로 우리들 입을 호사시켜주신 인해영샘 모두 고맙습니다.
12월의 추위는 일산반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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