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서 ‘기호’는 시를 구성하는 ‘중심 은유’ 혹은 ‘중심 이미지’ 로부터 만들어진
파생 이미지와 파생 은유 등 비유어 그리고 시어 일체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중심 은유와 중심 이미지를 찾으면 시 쓰기의 70%는 이루어진 셈이지요.
중심은유가 어느 날 갑자기 나를 찾아오면
시 쓰기가 시작됩니다.
물론 가만히 있는데 찾아오지는 않지요.
생각을 많이 하다보면 떠오르는 것입니다.
성당에서 울려오는 종소리가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간다는 느낌을 받고
꽃이 저 종소리를 들으면 활짝 피겠지,
향기도 종소리 덕분에 더 퍼져나가겠지
그러나 바위를 만나면 종소리도 아프겠지 등등의 상상을 하면 시가 만들어집니다.
중심 이미지를 도와줄 수 있는 이미지들을 불러 모아 엮어서
한편의 시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성북동 비둘기/ 김광섭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 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 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 1번지 채석장에 도루 가서
금방 따 낸 돌 온기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聖者)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1960년대에 지어진 이 시는 성북동 비둘기라는 중심 이미지를 가지고 시를 썼습니다.
판자촌이던 성북동이 근대화되면서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비둘기는 삶의 터전을 잃었고 원주민 또한 터전을 잃었습니다.
성북동 비둘기는 중의법을 사용하여 한 단어가 두 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자연물인 비둘기와 원주민을 담고 있는 것이지요.
중심 이미지를 돕기 위해 골짜기. 채석장, 성자 등의 파생 이미지가 사용되었습니다.
나무 / 박목월
유성에서 조치원으로 가는 어느 들판에 우두커니 서있는
한 그루의 늙은 나무를 만났다
수도승일까, 묵중하게 서있었다
다음날 조치원에서 공주로 가는
어느 가난한 마을 어구에 그들은 떼를 져 몰려있었다
멍청하게 몰려 있는 그들은 어설픈 과객일까
몹시 추워 보였다
공주에서 온양으로 우회하는 뒷길 어느 산마루에 그들은 멀리 서있었다
하늘 문을 지키는 파수병일까
외로워 보였다
온양에서 서울로 돌아오자
놀랍게도 그들은 이미 내 안에 뿌리를 펴고 있었다
묵중한 그들의 , 침울한 그들의, 아아 고독한 모습
그 후로 나는 뽑아낼 수 없는 몇 그루의 나무를 기르게 되었다.
나무를 마치 사람인양 의인법을 사용한 시입니다.
꽃도 그녀라고 표현하면 의인법이 됩니다.
비유의 능력이 글쓰기의 능력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유수같다’거나 ‘쟁반같이 둥근달’ 같은 진부한 비유는 쓰면 안됩니다.
‘누가 먹다버린 빵조각 같은 달’처럼 내가 창조한 비유를 써야 합니다.
달 포도 잎사귀/ 장만영
순이, 벌레 우는 고풍한 뜰에
달빛이 밀물처럼 밀려 왔구나.
달은 나의 뜰에 고요히 앉아 있다.
달은 과일보다 향그럽다.
동해 바다 물처럼
푸른
가을
밤.
포도는 달빛이 스며 고웁다.
포도는 달빛을 머금고 익는다.
순이, 포도넝쿨 밑에 어린 잎새들이
달빛에 젖어 호젓하구나.
이 시에서 순이는 포도에 비유되었고
포도를 달빛이 끌어안음으로써 여성이 성숙해진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대부분 달은 여성의 이미지를 나타내지만
이 시에서는 포도가 여자, 달이 남자의 이미지로 그려져 있습니다.
때로는 고정적 이미지가 탈피될 수 있습니다.
가을 / 송찬호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가슴을 스치자, 깜짝 놀란 장끼가 건너편 숲으로 날아가 껑, 껑, 우는 서러운 가을이었다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엉덩이를 때리자, 초경이 비친 계집애처럼 화들짝 놀란 노루가 찔끔 피 한방울 흘리며 맞은편 골짜기로 정신없이 달아나는 가을이었다
멧돼지 무리는 어제 그제 달밤에 뒹굴던 삼밭이 생각나, 외딴 콩밭쯤은 거뜰더 보지도 않고 지나치는 산비알 가을이었다
내년이면 이 콩밭도 묵정밭이 된다 하였다 허리 구부정한 콩밭 주인은 이제 산등성이 동그란 백도라지 무덤이 더 좋다하였다 그리고 올 소출이 황두 두말 가웃은 된다고 빙긋이 웃었다
그나저나 아직 볕이 좋아 여직 도리깨를 맞지않은 꼬투리들이 따닥따닥 제 깍지를 열어 콩알 몇 낱을 있는 힘껏 멀리 쏘아부치는 가을이었다
콩새야, 니 여태 거기서 머하고 있노 어여 콩알 주워가지 않구, 다래넝쿨 위에 앉아 있던 콩새는 자신을 들킨 것이 부끄러워 꼭 콩새만한 가슴을 두근거리는 가을이었다
콩알을 가지고 가을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훌륭한 시입니다.
콩이 제 값을 못받아서 내년부터는 콩 농사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이
묵정밭을 통해 잘 나타나 있고 죽고 싶다는 생각도
백도라지 무덤이란 사물로 잘 표현했습니다.
빙긋이 웃었다는 것도 씁쓸한 웃음이지요.
농촌의 궁핍한 삶이 엿보이는 가을 풍경을
진중하고 깊이 있게 잘 그려낸 수작으로 미당 문학상을 수상하였습니다.
가을 소재는 너무도 많지만 콩 하나로 일관되게 썼기에 시가 되었습니다.
다른 소재를 끌어들이더라도 중심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중심 즉 맥락과 줄기를 끝까지 끌고 가야 합니다.
현상 언어란 모습을 드러내는 언어를 말합니다.
언어를 통해서 그림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러기 위해선 이미지, 비유가 들어가야 합니다.
‘구름처럼 가는 나그네’가 형상 언어입니다.
반면 신문 기사에는 형상언어가 거의 없습니다.
정보전달의 글이기 때문에 대부분 관념 언어로 이루어집니다
형상화란 언어를 사물화하는 것으로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는 관념어 대신에
‘나는 네 창문을 바래는 새벽 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지요.
철학자와 노인의 인생에 대한 생각은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단지 철학자는 담론체계가 잘 되어 있을 뿐이지요.
담론체계는 장르에 따라 다릅니다.
담론체계를 알면 진술 내용을 이해하기가 쉬워집니다.
인간 실존 또는 존재에 관한 것을 문학, 예술로 표현하는 것이 문학이며
내가 경험한 것을 문학적으로 표현할 줄 알아야 문장가가 되는 것입니다.
감정적 진술은 전달적, 직접적, 일방적, 강제적입니다.
‘나는 슬프다’고 하면 듣는 자에게 선택의 여지를 줄 수 없습니다.
감정환기적 진술은 그 의미가 생성적이고 간접적이며 자율적입니다.
‘봄비에 나른히 젖은 복숭아 꽃잎’은
의미전달이 아니라 하나의 사물을 보여주는 진술입니다.
여기서 듣는 자는 자신의 상상력을 동원해 진실을 얻으며
슬픔뿐이 아니라 외로움, 고달픔, 애잔함 등의 다양한 정서를 느낄 수 있기에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이지요.
이런 애매성이 시어의 본질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