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첫날입니다.
가을의 출발이 1일과 동시에 월요일로 시작되다니
무언가 아귀가 딱 맞는 느낌이 좋습니다.
우리 일산반의 가을 학기 첫 강의도 이에 맞춘 듯이 시작되니 더욱 기분이 좋았어요.
한 주 쉬고 만난 벗들은 할 말도 그만큼 많아서
독서 모임은 한참 수다를 떤 후에야 출발했습니다.
그만큼 가까워지고 격의 없는 사이가 되었다는 증거인 것 같아 기뻤고요.
진미경샘이 가져오신 증편 떡과 총무님이 손수 만들어 오신 호박 쥬스 등등
먹을 것도 개강의 분위기를 한층 들뜨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새로운 분들이 오셔서 더 신났지요.
인혜영님과 라인옥님을 비롯하여 공개 강의를 들으러 오신 다른 두 분도
이번 학기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함께 하리라는 희망을 주셨습니다.
한 분이라도 새로운 벗이 공부를 하러 오는 것은 우리에게 큰 선물이라고 생각됩니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그만두신 박영숙샘도
또 다시 우리 곁으로 오시리라는 희망도 버리지 않을거고요.
이재무 교수님의 열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한 주 쉬는 동안 세상에 나온 새 시집 <슬픔에게 무릎을 꿇다>를 소개해 주시고
그 안에 있는 주옥같은 시를 공부하며 공개 강의는 시작되었습니다.
기쁨보다는 슬픔이 우리에게 깨달음을 준다는 뜻에서 지어진 이 시는
고난, 고통 속에서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지요.
슬픔에게 무릎을 꿇다 / 이재무
어항 속 물을
물로 씻어내듯이
슬픔을 슬픔으로
문질러 닦는다
슬픔은 생활의 아버지
두 손 모아 고개 조아려
지혜를 경청한다
슬픔은 생활의 아버지라는 메타포를 사용함으로써
슬픔에서 배우는 게 많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옛날 아버지가 했던 역할을 대행하는 대상이 너무 많아진 현대에는
아버지의 위상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요즘 아버지는 더 이상 가르쳐 줄 게 없습니다.
돈 벌어 오는 것 이외에는 존재 가치가 없는 아버지상이 서글픈 까닭이지요.
영화 <우아한 세계>에서는 깡패 짓을 하며 가족을 먹여 살리는 아버지가 나옵니다.
반어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표현된 말에 모순이 없으면 반어법입니다.
잘난 척 하는 친구에게 “그래 너 잘났다.”고 하면 반어법이 되는 것이지요.
반면 표현된 말에 모순이 있으면 역설이 됩니다.
찬란한 슬픔이 그 예가 됩니다.
아직은 생각을 해야 둘을 구별할 수 있건만 스승님은 즉각적으로 답이 나와야 한답니다.
이번 기회에 곡 암기하셔서 다음번에는 일 초도 지체하지 말고 정답을 맞추어 봐요.
스승님이 깜짝 놀라시게요.
나는 나를 떠먹는다 / 이재무
아내는 비정규적인 나의
밥을 잘 챙겨주지 않는다
아들이 군에 입대한 후로는 더욱 그렇다
이런 날 나는 물그릇에 밥을 말아먹는다
흰 대접 속 희멀쭉한 얼굴이 떠 있다
나는 나를 떠먹는다
질통처럼 무거운 가방을 어깨에 메고
없어진 얼굴로 현관을 나선다
밥 벌러간다
나는 왜 없어진 얼굴로 돈을 벌러 갈까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정규직인 나는 떳떳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굴욕적이기까지 한 비정규직의 생활을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폐선들 /이재무
신발장 속 다 헤진 신발들 나란히 누워 있다
여름날 아침 제비가 차마 들판 쏘다니며
벌레 물어다 새끼 주린 입에 물려주듯이
저 신발들 번갈아, 누추한 가장 신고
세상바다에 나가
위태롭게 출렁, 출렁대면서
비린 양식 싣고 와 어린 자식들 허기진 배 채워 주었다
밑창 닳고 축 나간,
옆구리 움푹 파인 줄 선명한,
두 귀 닫고 깜깜 적막에 든,
들여다 볼 적마다 웅클해지는 저것들
살붙이인 양 여태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
현관이 포구로, 신발들은 선박들 즉 엄마 선박, 아빠 선박, 자식 선박들로
표현되었습니다. 내가 신발을 신는 것은 고정 관념입니다.
신발이 나를 신고 옷이 나를 입을 줄 알아야지 시가 됩니다.
출항했던 선박들이 모두 귀향할 때까지 엄마 선박은 잠이 들 수 없지요.
명절은 원양 어선들이 귀향하여 닻을 내리고 선원들끼리 단합대회를 하는 날입니다.
시인의 상상력은 무한대로 뻗어 나가기만 합니다.
미역국을 끓이다 / 이재무
외박하고 돌아온 날로부터
찬바람 도는 아내와 냉전의 사흘 보내고 나서
맞는 일요일 아침
식구들 몰래 일어나 미역국을 끓인다
엊저녁 물에 담가 두었던 마른 미역
한 밤 새 통통 살이 올라
바가지를 흔들 때마다 철썩 철썩 파도를 부르고 있다
한 솥 가득 바다를 끓여내어
밥상에 올려놓고 늦은 아침을 먹는다
더운 국물로 식은 몸 덥히는 동안
아내 가슴에 옹골차게 박힌 돌
슬그머니 자취 감출 것인가
거실에 훈기가 돌고
영하의 날씨 베란다 얼어붙은 유리창에 핀
성에꽃들 죽죽 눈물 흘리며 창문 떠나고 있다
생활의 한 굽이,
또 그렇게 애써 외면하며 돌아가고 있다
부부 금슬이 잘 나타나 있는 시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꼭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글은 약간의 과장이 있어야 합니다.
연기자가 연기를 실감나게 해야 영화가 재미있는 것처럼
시도 산문도 거짓말이 보태져야 합니다.
그것이 독자를 위하여 쓰는 것이며
인쇄되어 거리로 나간 글은 내 것이 아닌
독자들의 것이라는 생각으로 글을 써야 합니다.
내 입장만을 생각하지 말아야 하며 자기 구도는 50%면 충분합니다.
목련 피는 저녁/ 이재무
또 한 페이지가 건성 넘어가고 있다
줄거리 건너뛰며 대강 대강 읽는 날 늘어간다
다 늦은 저녁 먹다 남은 된장찌개 다시 데워
아이와 먹는 중이라며 옛 애인에게서 문자가 왔다
한 시절 콧날 우뚝 했던 그녀 무럭무럭 늙고 있구나
낮에 입은 여자를 벗고 어머니로 갈아입은 그녀가
주방과 거실 오가며 내는 발소리 환하게 보인다
창 밖 공원 가지 열고 나와 허공의 살갗
살짝 데우고 있는 우아하게 교만한 꽃봉오리들
하얀 치마 속으로 공기 입자들
입질하는 치어들처럼 옴질옴질, 파랗게 몰려들고 있다
한 페이지는 하루이며 일 년은 소설 한 권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건성 넘어 간다는 것은 대충 살았다는 뜻이지요.
무럭무럭 늙는다는 것은 역설법으로 모순 형용입니다.
우리는 ‘무럭무럭 자란다.’ 에만 익숙하지요.
고정관념을 없애야 합니다.
‘광목 치마에 숯불 다리미가 다녀간 것처럼 좋던 피부도
50이 넘으니 무럭무럭 늙었다.’는 시인의 말이 구구절절 시가 됩니다.
‘낮에 입은 여자를 벗는다’는 기가 막힌 시적 표현입니다.
‘발소리 환하게 보인다’는 소리의 시각화로 우리는 소리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관념도 감각적으로 표현해야 하며 일상적 표현에 변화를 주어야 합니다.
이밖에도 감탄을 자아내는 우리 스승님의 시가 가득 담겨있는
따끈따끈한 시집 <슬픔에게 무릎을 꿇다>.
얼른 구입해서 모두 맛보고 싶습니다.
다음 주는 추석으로 아쉽게도 또 한 주를 쉽니다.
풍성하고 행복한 한가위 보내시고 다다음주에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