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숲길엔 이 나무 저 나무에서 흘러나온 그늘이 합수하여 출렁거린다.
걷다가 마음의 조롱박으로 그늘을 퍼서 마시고 세안을 한다.
우람한 그늘의 등과 어깨에 기대거나 혹은 그늘을 홑이불로 끌어다 덮고 누워
내 생을 다녀간 이들에게 나는 과연 슬픔이었을까,
기쁨이었을까, 그늘이었을까를 떠올려 본다.
또 서늘한 그늘 서너 바가지 푹 퍼서 등에 끼얹으며
이 생각 저 생각에 젖어 본다.
이래저래 여름은 정서의 키가 웃자라는 계절이다.
그늘이 늘 풋풋하고 싱싱한 것은 날마다 새로이 태어나기 때문이다.
이른 새벽이나 아침에 태어난 그늘은 하루 종일 열심히 농사를 짓다가
밤과 더불어 어둠이 오면 한 점 미련도 없이 사라진다.
그늘처럼 날마다 새로이 태어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죽음과 부활을 반복하는 그늘이 새삼 위대해 보인다.
서울신문 <생명의 창>에 실린 이재무 스승님의 <하일서정> 앞부분입니다.
추일서정을 패러디한 제목인 하일서정은
작가가 여름을 좋아하는 이유를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부지런한 계절 여름엔 밤꽃, 호박 오이 넝쿨, 생강 촉, 토란 싹, 풋고추, 풋가지와 함께
덩달아 사람들도 바빠져서 감자를 캐야 하고 김을 매 주어야 하지요.
비 올 때를 기다려 들깨 모를 내고 고구마 순을 묻어야 합니다.
고요가 단단해지는 계절이기도 한 여름엔
매미도 울음을 뚝 그치고 바깥에서 연애질하느라 분주하던 누렁이들도
마루 밑으로 기어들어가 그늘을 깔고 누워 오수를 즐깁니다.
천렵의 계절이기도 한 여름엔 악동들과 함께
소쿠리에 된장 주머니를 달아 놓고 저수지 가생이에 담가 놓고는
미역을 즐기다 해거름 출출해지면 소쿠리를 건져 올립니다.
논두렁을 기어나온 개구리 울음들이 뽕나무 가지마다에 주렁주렁 열렸고,
달은 우물 옆 팽나무 가지가 휘청하도록 크게 열렸다. 여름의 서정은 넓고 우묵하다.
각 단락마다 그림을 보듯 잘 묘사되어 있는 하일서정은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단락은 길이가 기준이 아닙니다.
생각, 소재가 달라져야 단락이 달라지고
그래야 일관성, 통일성이 있습니다.
위대한 작품은 독자들에게 불편함을 주어야 합니다.
블랙 코미디를 보고난 후 우리는 웃지만 마음은 쓸쓸하지요.
인간은 악한 마음 쪽으로 더 기울어져 있습니다.
문학은 악하고 불가능함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독자들은 당의정을 좋아합니다.
대중성 획득을 얻기 위해 달콤함을 취하면 굉장히 위험합니다.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는 없습니다.
7,80 년대 주소가 긴 집은 가난한 집이었습니다.
누구씨 댁에 사는 누구.......
그래도 시골에서 친척이나 친구가 올라오면 잠을 자고 갔습니다.
찜질방이 생긴 다음부터일까요?
아는 집에 신세를 지는 사람들은 사라졌습니다.
전셋집에 살아도 집들이를 하던 풍속도 사라졌습니다.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요?
사람 사이의 인정, 관계의 풍속이 사라진 것입니다.
어느 날 부터인가 거리는 방으로 넘쳐나기 시작했지요.
노래방, 찜질방, 비디오방, 안마방, 수면방 등등.......
집에 있는 방들이 그 역할을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것은 단절, 고립을 의미합니다.
컴퓨터 안에는 수만 개의 사이트가 있고
그 방끼리 클릭을 하느라고 분주합니다.
현대인들은 수만 개의 떨어진 섬들에 사는 존재입니다.
전자사막시대의 유목민들로 떠돌며
유일한 소통매체인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합니다.
환금성으로 전락한 도시 속의 집에 관한
글을 써보는 것도 좋겠다고 스승님이 말씀하셨지요.
웬만한 작가들이 다 다루어본 소재 ‘집’에 대해
우리도 고민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랜만에 나오신 박영희샘이 맛있는 도라야끼를
선물로 가져오셔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독토시간엔 한나샘이 단팥빵을,
정미 총무님이 가래떡을 나눠주셨고요.
모두들 감사드립니다.
지난 주말 무더위가 극성을 부리더니
어제는 단비가 내렸고
초복인 오늘도 서늘한 기온에
잠시 폭염을 피했습니다.
각 카톡방에는 삼계탕 배달이 그득합니다.
여러분들도 삼계탕과 함께 건강한 여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