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불빛 / 김신용
회현동 굴다리 밑에서 새어나오던 그 불빛
나무판자로 얼기설기 엮은 진열대 위에 책 몇 권 올려놓고
내 늦은 밤의 귀가 길을 멈추게 하던,
흐린 진열창에 비쳐진 그 책들을 보며, 들어갈까? 말까?
호주머니 속의 그날 벌이를 가늠하며, 내 발걸음을 망설이게 하던 그 불빛
그렇게 망설이다가 지고 있던 지게를 벗어 굴다리 벽에 세워두고
유리문을 들어서면, 졸리운 듯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던 여자
언제나 내가 보고 싶던 그 달의 문예지 같은 얼굴로, 나를 맞아 주곤 했었다
그 문예지를 손에 들고, 사야 하나? 말아야 하나? 또 망설이다가
기어코 책을 사, 그날 지불해야 할 양동의 방세와 밥값 걱정 때문에 더 무거워진
등에, 다시 지게를 얹고 저만큼 걸어가면
그런 내 뒷모습을 무슨 희귀동물처럼 바라보던 그 불빛
언젠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혹시 글을 쓰세요? 작가 지망생이에요? 하고 물어와
나를 당황하게 했던-, 그리고 그 날은 눈이 내렸던가?
거리마다 송년의 불빛들로 반짝이던 그 날
청계천 노점에서 막걸리 몇 잔에 얼큰해져 돌아오는 길
꼭 거쳐야 할 경유지인 것처럼 그불빛을 찾아 들어 글 만 쓰면 배가 고파진다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주제에 글을 써야 하느냐고-, 술주정 같은 푸념을 했을 때
그 서점의 여자는 묵은 책의 먼지들 털듯 말했었다
쓰고 싶은 사람에게 글을 쓰게 하세요-, 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리속은 하얗게 비어 왔었고 눈앞이 아득히 흐려졌었다
그 불빛
아무리 배가 고파도 쓰고 싶은 사람에게 글을 쓰게 하라는-, 그 전언
마치 죽비처럼 내 등짝을 후려쳐, 부끄럼으로 눈 내린 밤길을 더 비틀거리게 했던
지금도 글을 쓰다가 문득 눈앞이 아득히 흐려질 때, 꺼내보곤 하는
회현동 굴다리 밑의
그 불빛
시인은 초등 중퇴자로서 한국판 장발장이었습니다.
소년원을 다섯 번이나 드나들다가 책을 읽게 되었죠.
그 후 품팔이를 하면서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었습니다.
빵을 얻기 위해 정관수술까지 해야 했던 시인은 자식도 낳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은 1급 시인이 되었지만 위의 시는 문학 지망생일 때 쓴 시입니다.
‘나무판자로 얼기설기 엮은 진열대 위에 책 몇 권 올려놓고’는 형편없는 서점임을 보여줍니다.
‘호주머니 속의 그날 벌이를 가늠하며’는 일당벌이의 삶을 그리고 있지요.
‘졸리운 듯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던 여자’에서는 영업이 잘 안 되는 서점임을 알 수 있지요.
‘그 문예지를 손에 들고, 사야 하나? 말아야 하나? 또 망설이다가’에서는
책을 사고 나면 방세를 낼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을 느끼게 해줍니다.
‘희귀동물처럼 바라보던 그 불빛’은 서점 불빛을 말합니다.
‘쓰고 싶은 사람에게 글을 쓰게 하세요’는 심드렁하고 무심한 여주인의 마음을 나타냅니다.
결국 그 불빛 때문에 그는 시를 썼습니다.
그 불빛은 바로 쓰고 싶은 사람이 글을 써야한다는 서점주인의 말입니다.
절박해야 글이 나옵니다.
배부르고 여유가 있으면 글이 나오지 않지요.
이 시인에게 글쓰기는 자기 구원이었습니다.
책값을 아끼지 않을 정도로 그에게는 필수적인 행위였습니다.
그네/ 임영조
어디서 명퇴한 중년일까
아파트단지 어린이 놀이터에서
반백의 사내가 아침을 민다
서너 살 손주 놈을 그네 위에 앉히고
줄을 꼭 잡아라! 놓치지 마라!
거듭 당부하면서 힘껏 밀어올린다
와와, 둥근 해가 솟는다 아이가 뜬다
허공 가득 퍼지는 해맑은 웃음소리
나뭇잎들 팔랑팔랑 손뼉을 친다
땅을 박차고 하늘 높이 올라라
올라가서 세상을 내려다보라
검버섯 핀 손등으로 그네를 미는
저 반백의 사내는 지금, 놓쳐버린 꿈
흘리고 온 세월을 미는 것일까
남은 생을 밀어내는 것일까
생이란 무릇 그네 타기 같은 것
아무리 밀어도 밀어놀려도 그네는
다시 제자리로 내려올 것이다
정상으로 밀어올린 욕망은 곧
땅으로 굴러 내릴 바윗돌인데
계속 잔머리를 굴리는 시쉬포스들
날마다 제 한 몸 밀어올리려
아찔한 그넷줄 잡고 용쓰던 퇴역
오늘은 등뼈가 흰 반백으로 돌아와
어린이 놀이터 그네를 민다
밀 때마다 손주는 멀리 떠나고
허허로운 배경으로 홀로 남는다
시 <깃발>과 비슷한 구조입니다.
상승과 하강이 반복되는 대립구조이지요.
성취를 하면 기분이 좋지만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글 한 편을 완성하고 나면 기쁘지만
다시 새로 시작을 해야 합니다.
작가는 기술이 연마된 장인이나 달인과 다릅니다.
기술은 습득하면 힘들이지 않고 얻어낼 수 있지만
예술가들은 시지프스처럼 매번 바윗돌을 올리는 듯한 노고를 바쳐야 하니까요.
글쓰기를 할 때마다 힘이 드는 까닭을 이 그네가 말해주는 듯 합니다.
빈 그네 / 이재무
암운한 조국과 민족 때문에, 부끄럽지만 한 끼도 걸러본 적 없는 내가
한 여자가 주는 실연으로 꼬박 사흘을 내리 굶은 적이 있다
그녀가 생사 관장하던 그 해 겨울 눈이 자주 내려 벌판을 백지로 만들곤 해서
나는 가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을 수놓곤 했는데 아시다시피
눈은 나흘 이상을 살아내기 어렵다
그해 시해 당한 대통령 때문에 휴교령이 내려지고 통행금지도 2시간이 앞당겨졌다
나는 예정보다 빨리 군의 부름을 받았다
망설이던 끝에 그녀를 불러내 밥과 술을 사주고
화원에 들러 화분 하나를 사서 그녀의 품에 안겨주었다
음악다방에 들러 최백호의 입영전야를 청해 듣고 나와 으슥한 골목 돌아
어린이 놀이터에 갔다 놀이터엔 빈 그네가 있었는데
작고 여리게 몸 흔들며 때마침 내리기 시작한,
자꾸 칭얼대며 달라붙는 눈발 털어내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충직한 하인이었다 그녀가 걸터앉은 그네를 열심히 밀어주었다
그녀의 밥사발같이 둥근 등이 내 가슴에 부딪쳐 오는 동안
나는 질 나쁜 연탄처럼 자주 꺼지곤 하던 우리의 사랑을 떠올렸다
탁구공같이 경쾌한 그녀의 웃음이 차고 단단해진 밤공기를 가르고 가서
개천바닥 진흙에 몸을 문질러댔다 내 몸 속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자꾸 나쁜 생각이 나서 얼굴에 땀이 솟았다
눈은 어느새 그쳐 있었고 바람은 제법 사나와졌다
나는 구두에 달라붙는 흙을 털어내면서 집으로 왔다
유배지에 갇혀 지내는 동안 그녀에게서 온 몇 번의 편지는 나를 감동시켰다
면회 온다던 날에 소포로 날아온 동화책 조나단이 관물대에 놓여 있었다
그녀는 높이 나는 새가 되어 나를 떠났다
그날 이후 마음의 배가 고파오면 나는 그네를 떠올린다
누군가를 열심히 밀어주는 동안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미는 동안 쉽게 몸이 달아오르지 않기를 나는 바란다
뜨거워지면 사랑은 벌써 떠날 채비를 하기 때문이다
시인의 직접 경험한, 진심이 담긴 시라고 합니다.
‘눈은 나흘 이상을 살아내기 어렵다’는 삼한사온이 뚜렷했던 시대였기 때문이지요,
‘나는 구두에 달라붙는 흙을 털어내면서 집으로 왔다’는 미련과 집착을 나타냅니다.
심리학에서는 누군가가 그립고 보고 싶다는 것은
나를 버리지 않을까하는 의심 때문이지
실제로는 그리움이 아니라고 합니다.
믿음이 생기면 그리움을 끝을 맺는다고 하네요.
프랑스 철학가 라깡은 “사랑은 없다.
대상에 대한 욕망이 이루어지면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로 떠나간다.“라고 했다는군요.
타인에 대한 사랑은 자기애의 투사일 뿐이라고요.
부부간의 사랑을 착각하지 말라는 스승님의 마지막 말씀에 모두들 폭소를 터뜨렸습니다.
이래서 “알면 다친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명언이 나온 것일까요? ㅎㅎ
겨울학기의 첫날이었습니다.
래순샘이 사 오신 말랑말랑한 빵을 맛있게 먹었지요.
수업을 참관하러 오신 두 분이 다음 주에도 꼭 오시기를 기대합니다.
발목 부상으로 결석하신 인영샘 그리고 성희샘도 다음 주에는 꼭 나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