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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 속의 검은 잎(일산반)    
글쓴이 : 한지황    15-11-30 19:50    조회 : 4,151

안개 / 기형도

 

1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2

 

이 읍에 와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어떤 날은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

안개의 軍團은 샛강에서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다.

출근길에 늦은 여공들은 깔깔거리며 지나가고

긴 어둠에서 풀려나는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나오는 것이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 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와 식구가 되고

멀리 송전탑이 희미한 동체를 드러낼 때까지

그들은 미친 듯이 흘러다닌다.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고,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

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聖域이기 때문이다.

날이 어두워지면 안개는 샛강 위에

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놓는다. 순식간에 공기는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찬다. 그 속으로

식물들, 공장들이 빨려 들어가고

서너 걸음 앞선 한 사내의 반쪽이 안개에 잘린다.

 

몇 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했다.

기숙사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 겨울엔

방죽 위에서 醉客 하나가 얼어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안개가 걷히고 정오 가까이

공장의 검은 굴뚝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젖은 銃身을 겨눈다. 상처입은 몇몇 사내들은

험악한 욕설들 해대며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

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났다. 그 누구도

다시 읍으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3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1985'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입니다.

샛강은 광명 옆의 안양천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안개의 강은 소유격 은유로서 자가 들어가는 은유법입니다.

역설적 은유는 고통의 축제처럼 상호 모순이 되는 은유입니다.

살아있는 자만이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지요.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역시 소유격 은유로 지금은 낯설게 여겨지지 않지만

이 시가 쓰였던 시대로서는 무척 도시적인 표현입니다.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라는 표현 또한 도시적이지요.

활물적으로 인식하는 컨트리과는 도저히 쓸 수 없는 표현으로

도시 주변에서 살았던 시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술가들의 위대한 업적은 병과 관련 깊다고 합니다.

색맹이었던 고흐의 <해바라기>는 일반적인 노란 색깔이 아닙니다.

고흐로서는 보이는 그대로 그린 것입니다.

뭉크의 <절규>도 정신질환을 앓았던 작가의 고통 때문에 그려졌습니다.

수식어를 보면 시인의 정서를 알 수 있습니다.

기형도의 부정적이고 우울한 성향이 느껴집니자.

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 나오는 것이다도 창의적 표현으로 안개랑 결부시키기 위해

이렇게 쓰여 졌으며 예민한 관찰력이 돋보입니다.

몇 가지 사소한 사건을 통해 시대적 상황을 암시합니다.

안개 공화국이라는 말이 유행되던 시기였지요.

검은 굴뚝은 문명에 대한 공포감을 드러냅니다.

기억에서 밀려났다는 문장은 번역체 같지만 시적 표현입니다.

무럭무럭 자란다는 표현보다는 무럭무럭 늙는다는 표현이

역설과 함께 재미를 줄 수 있습니다.

주목을 끌만한 표현이 많은 시로

전체적으로 어둡습니다.

도시적 문명 세계에 대한 쓸쓸함이 묻어납니다.

시는 반투명성이 강합니다.

프랑스 철학자 데리다가 독자적으로 만든 차연(差延)을 통해

기의와 기표는 일치할 수 없기에 즉 차이가 나서 연기될 수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정답이 없기에 문학작품에 대한 논문이 계속 발표되는 것이 이를 증명합니다.

 

 

 

빈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연인과의 짧았던 밤은 고통스러웠던 기억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겨울 안개 또한 순조롭지 못했던 관계, 방황, 우울을 뜻합니다.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라는 문장 때문에 이 시는 살아났습니다.

작가에게 흰 종이는 그 자체가 공포이지요.

내 것이 아닌 열망들은 사랑을 잃었기 때문이지요.

빈집은 육체를 뜻할 수도 있습니다.

흔히들 몸을 집에다 비유하곤 하니까요.

 

이 밖에도 기형도의 시 <입속의 검은 잎>

통치자를 운전사에 비유해 운전을 잘못하면 승객이 고통을 당한다고 말함으로써

정치적 메타포가 담긴 시입니다.

흰 연기가 튀어나온다는 표현이 낯설고 생소하며 재미있습니다.

 

<위험한 가계>,는 기형도를 이해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읽어야 할 시로

어린 시절 트라우마가 평생 정신세계를 지배함을 말해주는 시입니다.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는 기막힌 표현입니다.

따옴표를 생략한 대화체를 처음으로 시도한 이성복 시인처럼

이 시에서 기형도 시인은 따옴표를 생략했습니다.

 

<물속의 사막>은 영화 기법을 사용한 시로

평생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아버지의 얼굴이

비오는 날 유리창을 통해 환청과 환상으로 다가옵니다.

생각 자체가 악몽임을 말하고 있지요.

 

오늘은 가을 학기 마지막 수업으로 기형도의 시를 공부했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시를 설명해 주신 스승님 덕분에 한결 이해가 쉬워졌습니다.

앞으로도 더 많은 시인들의 정신세계를 들여다보며

시적 표현을 배우고 수필에도 활용해야겠습니다.

한 주도 쉬지 않고 다음 주 12월에 겨울학기 개강이 있습니다.

새로운 얼굴이 기대되고 우리 벗들도 빠짐없이 합류하시기를 소망합니다.

11월의 마지막 날이 속절없이 사라져 가고 있네요.


김선희   15-11-30 20:17
    
한학기 동안 반장님과 총무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여러 벗들과 함께 공부했기에 즐겁지 않았나 싶어요

기형도의 시는 지금도 여전히 매력적인 면이 있더군요
오늘날의 20대의 청춘들에게도 공감이 가는 시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학기 동안 이해의 지평을 넓혀주신 이재무 샘 감사합니다^^

건강 유의하시구 담주 새학기에 다들 만나요~~^^
     
한지황   15-12-01 08:28
    
선희샘이 일산반 일원이 된 지도 일 년이 되어가네요.
한국산문에 큰 역할을 하는 선희샘이 오셔서 얼마나든든한지 몰라요.
헤이리집에 놀러갔던 추억도 생생하고요.
봉평 메밀밭까지도......
바빴던 한 해의 마지막 달이 되니 지난 시간들이  그리워집니다.
진미경   15-11-30 22:33
    
11월의 마지막 밤이  한시간 반 뒤면 아듀 하고 물러납니다.
11월이 쓸쓸함의 달이라면 12월은 겨울의 주인공처럼 화려합니다.
기형도의 정서가 11월과 닮아있어 오늘 수업이 절묘하다! 생각했고요.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한해가 얼마 안 남은 시점에서
게으르고 무른 자신에게 부끄럽다고 고백합니다.
반장님 후기 쓰시느라 수고많으셨어요.
감사합니다.^^
     
한지황   15-12-01 08:34
    
가버린 11월은 내년이 되어야 다시 오겠지요.
정신없이  가버릴 12월 첫날이네요.
올 한 해 가버린 시간만큼 얻은 것도 있어요.
한국소설들의 등장인물들과 동고동락하며
그들의 슬픔을 조금이나마 공감해 보았지요.
시대적 아픔도 깨달았고요.
내년 삼월이면 창비 한국소설도 종착역에 도달하겠지요.
미경샘과 함께.....
박래순   15-11-30 23:02
    
ㅎㅎ 컨트리과의 표현이라면 '노인은 무럭무럭 익어간다.'라는 표현도 좋겠지요.
시를 공부하면서 시를 읽고 해석하는 법을 배웠지요.
시는 참으로 난해하고 뜻을 모르겠어서 그동안 멀리 했었는데,
해석하는 방법을 배우고 보니 시에 대하여 매력이 느껴지네요.

겨울 초입에 어울리는 시 한 편 옮겨 봅니다.

산중 여관

마당엔 제비가 낙엽을 쓸고
몇 개인지 모를 방을 옮겨 다니며
물고기들이 걸레질을 할 동안
오동나무와 족제비는 아궁이를 지펴 서둘러 밥을 짓는다.
뒤뜰에는 장작을 패는 바람의 도끼질 소리
혹시나 오늘은 어느 객이 찾아오려나
주인인 듯한 허름한 옷차림의 산국화
현관문 앞 숙박계를 어루만지며
길고 흰 수염을 쓰다듬듯 시냇물이 산골짜기를 빠져나가는
창밖을 우두커니 바라본다
세상의 길이란 길은 모두 잃어야 한 번 쯤
묵어갈 수 있는 산중 여관
 
함명춘

부지런하고 기억력 좋은 울 반장님, 후기 고맙습니다.
     
한지황   15-12-01 08:43
    
어제 신문에서 이 시를 읽고 공유하고 싶었는데 래순샘도 저랑 같은 생각을 하셨군요. 반가워요.
가끔은 길을 잃어봐야 얻는 것이 있나봐요.
앞만 보고 똑바로 걷기만 하면 놓치는 것이 많은 것처럼울유......
산중여관에 살고 있는 제비, 물고기, 오동나무, 족제비, 산국화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 정겨워요.
함명춘시인도 컨트리과?
서울내기 제가 부러워할 수 밖에 없는.......
최영자   15-12-01 11:24
    
입 속의 검은 잎,  어느푸른 저녁 ,  죽은 구름 , 물 속의 사막 등
  제목부터 심상치 않은 기형도 시인의 시를 함께 공부 할 수 있어서 더욱 알찬 수업시간이었습니다.
  벌써 다음달 시론 수업시간이 기다려집니다.

  이제 12월입니다.
 겨울이 되어도 서로 따뜻하게 감싸주는 문우님들이 계시기에 쓸쓸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스승님, 반장님, 문우님, 함께라서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
     
한지황   15-12-02 10:32
    
올해는 영자샘께 더 뜻깊은 한해였으리라 여겨져요.
옻닭의 쓰라렸던 추억이 멋진 등단작으로 거듭났으니까요.
구수한 성품만큼 따스한 수필을 쓰실 수 있는 영자샘의 경험들이
앞으로도 단장하고 나들이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