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름진 거울 / 이재무
거울 속 굵게 팬 주름들 곁,
갓 태어난 잔주름들
어느새 일가를 이루었구나
저 굴곡과 요철은
시간의 밀물과 썰물이 만든 것
주름 문장을 읽는다
주름 속에는 눈 내리는 마을이 있고
눈에 거듭 밟히는
윤곽 흐릿한 얼굴이 있고
만지면 촉촉이
손에 습기가 배는 풍금소리가 있다
이마에서 발원한 주름 물결
번져서 온몸을 덮으리라
,
눈 내리는 마을은 시련을 뜻하고
윤곽 흐릿한 얼굴은 흘러간 나의 인연, 첫사랑을 말합니다,
풍금소리는 말할 수 없는 서정,슬픔 희로애락이지요.
우리는 태어나 책 한 권을 쓰고 갑니다.
굴곡과 요철은 주름을 말함이요
세월이란 펜으로 내가 쓴 문장들입니다.
사람은 곧 책입니다.
방문객 / 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나에게 오는 사람은
그의 과거, 현재, 미래와 함께
나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것이지요.
사람을 만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사건인지 깨닫게 됩니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그를 맞아야겠습니다.
“시는 어지러운 마음속에, 부족한 마음에
깃들기를 즐기는 것이 아닐까?“라고 함민복 시인은 말합니다.
박범신 소설가는 “문학은 고통을 먹고 자란다.”고 했습니다.
고통과 불행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지요.
오늘도 함민복 시인의 주옥같은 문장을 공부했습니다.
‘아지랑이 수직의 악보를 타고 노란 나비 너울너울 춤추며’
아지랑이를 악보로 보고 나비가 춤추는 정경이 그려지지요?
서정주 시인은 ‘초록이 지쳐 단풍이 든다.’고 했습니다.
봄부터 초록색옷만 입던 잎사귀들도 지겨웠나 봅니다.
홍엽이 되더니 낙엽으로 변하니까요.
단풍을 보면서 상상의 날개를 펴보는 것이 글쓰기의 시작입니다.
하늘이 우리에게 띄우는 선홍빛 연서라든가
낙엽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뭔가 일깨워주려는 듯
느낌표 하나가 하늘에서 떨어져 내려온다고 생각하는 것도 재미있지요.
‘미루나무가 깜짝 놀란다.’
글이 잘 안 풀릴 때는 의인화로 써 보세요.
‘미루나무는 겁에 질린 사람처럼 파르르 이파리를 떤다.’
감정이입이 잘 된 문장입니다.
영실營實 / 김신용
산비탈 가시덤불 속에 찔레 열매가 빨갛게 익어 있다
잡풀 우거진 가시덤불 속에 맺혀 있어서일까?
빛깔은 더 붉고 핏방울 돋듯 선명해 보인다
겨울 아침, 허공의 가지 끝에 매달린 까치밥처럼 눈에 선연해
눈이라도 내리면, 그 빛깔은 더욱 고혹적일 것이다
날카로운 가시들이 담장의 철조망처럼 얽혀 있는 찔레 덤불 속
손가락 하나 파고들 틈이 없을 것 같은 가시들 속에서
추위에 젖은 손들이 얹히는 대합실의 무쇠난로처럼 익고 있는 것은
아마, 날개를 가진 새들을 위한 단장일 터
마치磨齒의 입이 아닌, 부드러운 혀의 부리를 가진 새들을 기다리는 화장일 터
공중을 나는, 그 새들의 눈에 가장 잘 띄일 수 있도록
그 날개를 가진 새들만 다가올 수 있도록
열매의 채색을 운영해왔을 열매
영실이라는 이름의 열매
새의 날개가 유목의 천막인 열매
새의 깃털 속이 꿈의 들것인 열매
얼마나 따뜻하고 포근했을까, 그 유목의 천막에 드는 일
새의 복부속에 드는 일
남의 눈에는 영어 같겠지만, 전락 같겠지만
누구의 배고픔 속에 깃들었다가 새롭게 싹을 얻는 일, 뿌리를 얻는 일
그렇게 새의 먹이가 되어, 뱃속에서 살은 다 내어주고 오직 단단히 씨 하나만 남겨
다시 한 생을 얻는 일, 그 천로역정을 위해
산비탈의 가시덤불 속에서 찔레 열매가 빨갛게 타고 있다
대합실의 무쇠난로처럼 뜨겁게, 뜨겁게 익고 있다
식물들은 죽기 전 열매를 많이 맺습니다.
익기 전에 열매가 맛이 없는 이유는 새나 사람들에게 아직은 먹지 말라는 뜻이요
다 익었을 때 향이랑 맛이 매혹적인 이유는 이제 먹어도 된다는 뜻입니다.
열매는 먹혀야만 단단한 씨만 남아서
또 다른 열매로 태어날 수 있지요.
이 모든 것이 종족 번식의 본능에서 비롯된 자연의 법칙입니다.
어떤 출토 / 나희덕
고추밭을 걷어내다가
그늘에서 늙은 호박 하나를 발견했다
뜻밖의 수확을 들어올리는데
흙 속에 처박힌 달디단 그녀의 젖을
온갖 벌레들이 오글오글 빨고 있는 게 아닌가
소신공양을 위해
타닥타닥 타고 있는 불꽃 같기도 했다
그 은밀한 의식을 훔쳐보다가
나는 말라가는 고춧대를 덮어주고 돌아왔다
가을갈이 하려고 밭에 다시 가보니
호박은 온데간데 없다
불꽃도 흙 속에 잦아든 지 오래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녀는 젖을 다 비우고
잘 마른 종잇장처럼 땅에 엎드려 있는 게 아닌가
스스로 죽음을 덮고 있는
관뚜껑을 나는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한 움큼 남아 있는 둥근 사리들!
생명을 가진 것은 남의 것을 빼앗아 먹다가
결국 죽어서 남의 밥이 됩니다.
자연의 순리입니다.
시인은 늙은 호박이 죽어 여러 벌레들을 먹이고
종잇장이 되어버린 것을 소신공양이라 했습니다.
우리의 육체도 예외가 아닙니다.
어느 생명체의 먹이가 되어 그 일부가 될 테니까요.
가을이 무르익어 갑니다.
이왕이면 가을에 관한 글을 써보라고 스승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파란 가을 하늘과 나날이 짙어지는 단풍들을 관찰하며
상상력을 펼쳐보며 시인이 되어 보세요.
가을은 결코 오래 머무는 법이 없답니다.
오랜만에 나오신 이순선샘이 따끈한 고구마를
한 팩 씩 예쁘게 싸오셔서 다들 맛있게 먹었습니다.
총무님은 달달한 스낵바를 나눠 주셨고요.
풀꽃 문학상을 수상하신 스승님은 참 행복해 보이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