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 댄서를 시작하다-성민선>
특별히 고칠 데 없이 재미있게 읽었다는 평이었습니다.
<칡-문경자>
‘간다’는 현 상태를 묘사하는 말이며 ‘갔다’는 간 이야기를 쓴 것입니다. 각각 기본형 어미의 일반적 현상과 과거형 어미의 체험을 기록하는 행위인데 그 구분이 되어있지 않고 들쭉날쭉합니다.
본문 중, 우동식의 시를 그대로 삽입하는 것보다 이 시가 왜 좋은지 느낀 것을 우리 삶, 인간의 삶, 살아있는 삶과 연결해 주어야 풍성한 글이 됩니다. 비유와 메타포(metaphor)를 개발해야 합니다.
옛날의 정서를 재확인하는 시간의 간극과 격차로 인한 다양한 정서는 작가의 글을 살리는 장점이라고 했습니다.
아울러, 수정해서 다시 제출한 <할미꽃>은 옛날에 본 할미꽃의 감정이 사라져 메마른 꽃이 되어버렸다는 평이었습니다.
<가련한 여인-김희성>
소설인지 수필인지 궁금하다는 질문에, 아는 분의 이야기를 일기로 썼던 것이라고 했습니다. (몇 년 전, 개인 작품집에 함께 실렸던 글이라고 함)
나와 상관없는 ‘옥희’의 생애를 썼으므로 소설이면서 글의 후반부 작가의 개입으로 인해 수필로 보이기도 합니다. 작가는 개입하지 말고 빠져야 합니다. 작가가 주인공의 사랑을 옹호할 필요는 없습니다. 또한, 작가의 개입부분은 후기나 서문에 들어가야 맞습니다.
사랑이 어렵습니다. 어려우므로 내가 인정을 해 주어야 해서, 그래서 썼을 것입니다. 이 글은 근대 초기 신소설에 해당하는 작가의식으로 되어있습니다. 사랑을 쓰고 싶은 작가들의 대열에 동참해서 썼으나 지금 시대에는 낡은 주제입니다.
자아인식, 자아발견, 자아실현, 나를 깨달음 등이 근대의 핵이었습니다. 또한 ‘사랑’으로 자아실현을 하고자 한 것이 소설의 중요한 테마였으며 근대문학의 시작입니다. 나혜석이 대표적입니다.
우리 역사상 ‘사랑’이 가장 엄숙하며 고귀하다는 생각이 지배하던 시기는 고전주의 시대입니다. 서어 월터 스콧의 <아이반호우>가 그 예입니다. 양반과 귀족, 왕의 주변인들이 대부분으로 계층 간의 문제들이 주였으며 사랑은 양반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깨어지기 시작합니다.
사랑이 욕정인지 욕망인지 성욕인지 가슴속 보이지 않는 무엇인지 그 한계를 명확히 지어서 글(소설)을 쓴 사람은 거의 없으며, 구분되지 않은 채(채털리 부인의 사랑-D. H. 로렌스) 내려오게 됩니다. 이후 계급과 계층을 넘나드는 문제의 사랑이 등장하는 프롤레타리아 문학(벙어리 삼룡이-나도향)이 발전하게 되고 근대화 이후 계층 간의 대립구조와 물욕, 돈이 개입하는 평민들의 이야기가 등장하면서 순수한 사랑은 없어져 버립니다. 결국, 이러한 우여곡절들이 이광수의 <유정>처럼 인간의 진실한 사랑을 쓰게 되고, ‘사랑’을 쓰고 싶은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달콤 살벌한 취미-김연희>
암벽등반이 취미인 자신의 체험에서 우러난 글입니다. 특히 뒷부분이 좋았습니다. 좋은 삶을 사는 것 같다는 부러움을 받은 글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오늘 다 끝내지 못한 2편을 포함 모두 4편의 합평과 한국산문 1월호를 살펴보겠습니다.
이깟 추위(ㄷㄷ~)로는 우리 반 월님들의 열정을 막을 수는 없죠! 월요일 아침 강의실에서 나누는 따뜻한 커피한잔의 여유로움, 나만을 위한, 오롯이 나를 위한 80분의 시간이란... 그 끝에 찬란한 영광은 없을지라도 이미 ‘일 만 시간’을 향해 걷기 시작한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물론, 점심식사와 티타임은 소소한 즐거움이구요. 함께 가요! 2월에 뵐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