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무>
이반 투르게네프
이번 주는 김은희샘의 부군이신 안동진 선생님의 특강이었습니다. 투르게네프를 전공하신 안선생님의 강의는 힘 있는 목소리와 열정으로 강의실을 채웠습니다.
<무무>는 19세기적인 아름다움으로 꽉 짜여 진 소설로, 결점이 없이 미학적으로 잘 조직되어 있습니다. 등장인물의 성격은 처음부터 끝까지 바뀌지 않습니다. 투르게네프는 그들의 외모를 생긴 것이나 옷차림 등으로 자세히 묘사했으나 유독 여지주에 대해서는 외모에 대한 설명도 없고 이름도 알려주지 않습니다. 이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지주계층 이라면 그 사회를 대표하는 이미지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소설은 벙어리이며 귀머거리인 농노 게라심과 그가 사랑한 강아지 무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무무’는 개의 이름이지만 무무라는 소리는 소의 울음소리입니다. 이는 우직하고 충직하게 일 잘 하는 게라심 자신 일수도 있습니다. 또한 ‘게라심’이라는 이름은 ‘벙어리 삼룡이’ 같은 촌스러운 이름입니다.
큰 덩치에 농사일을 잘 해내던 게라심은 여지주의 명으로 그녀의 집으로 와서 마당쇠가 됩니다. 그 집의 세탁부 타티야나를 좋아 했지만 그녀가 다른 사람과 결혼하여 떠난 후 주워 온 강아지 ’무무‘를 정성을 다해 키웁니다. 그러나 여지주의 명령으로 무무를 강물에 빠트려 죽이고 밤새 걸어서 시골의 고향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에는 지주에 대한 저항과 볼초크라는 이름의 개처럼 수동적인 삶을 사는 다른 하인들에 대한 비판이 있습니다. 그 시대의 농노는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었기 때문에 게라심의 행보는 지주에 의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을 무릅쓴 것이었습니다.
떠났다가, 머물렀다가, 다시 돌아가는 극히 단조로우면서도 균형감 있는 구성 속에서 타의로 왔다가 자의로 돌아간 게라심을 통해 ‘네 자리를 벗어나지 말라’는 메시지가 보입니다.
이는 오랫동안 타향살이를 한 투르게네프가 고향을 그리워했던 반증일지도 모릅니다. 독일 베를린 대학에서 공부하던 시기 외에도 드물게 짧은 일정의 귀국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외국에서 보냅니다. 긴 외국생활을 하면서 태어나고 자란 중부 러시아의 자연을 그리워했을 것입니다.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가 1급 작가라면 투르게네프는 1.5급 작가였습니다. 그 이유는 극단의 상황일 때 극단으로 밀어붙이지 못한 묘사에 있습니다. 예를 들면 깊은 슬픔에 잠긴 주인공을 설명할 때 ‘방에서 하루 종일 나오지 않았다’ ‘아무도 게라심을 보지 못 했다’라는 것으로 독자의 상상력에 맡겨버린 ‘비밀의 심리학’ 때문이었습니다. 고통의 심연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라면 주인공의 고통을 합의할 수 있는 극단으로 몰고 가서 공감과 치유를 불러왔을 것입니다. 그때 명작이 됩니다.
염세적이었던 투르게네프는 무무 이외의 다른 작품들 속에서 사랑의 실패는 죽음으로 이어지게 했습니다. 결혼한 적이 없는 그는 어머니의 하녀 사이에서 딸 하나를 낳았고 유부녀인 프랑스 가수 폴리나 비아르도를 평생 사랑했습니다.
‘문학적 감수성은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못 보았던 것을 보는 것’ 이며 ‘작가는 우리 인식의 한계를 확장시켜야 한다’ 는 내용으로 강의가 끝났습니다.
우리들의 의견으로는 ‘빵이 아닌 고급한 결핍에 대한 이야기였다’ ‘약자를 밟으려는 인간의 잔학성을 보았다’ ‘약자의 삶은 고달프다’ 등등이었습니다.
안선생님은 강의를 시작 할 때,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이 문학을 선택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씀과 함께 문학을 사랑하는 우리에게 감사 하다고 하셨습니다.
‘문학은 비타민 이다’라는 말을 본 적이 있습니다. 조절 영양소인 비타민을 공급받지 못하면 병에 걸립니다. 문학의 결핍이 개인과 세상을 병들게 합니다. 문학을 공부하면서 나 자신 이라도 지켜야겠습니다.
김은희샘이 사오신 초밥과 조지아산 와인, 박서영샘의 샐러드, 김정희샘의 월병까지 풍성하고 맛있는 점심식사 감사드립니다. 생일이라고 아이스커피까지 쏘신 박서영샘 감사합니다.
미국에 계신 정진희 회장님, 우리끼리만 즐거운 시간을 갖고 있네요. 미국에서 좋은 시간 보내세요.
다음 주는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을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