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 / 김사인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를 벗기고
눅눅한 요 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 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순한 너를 뉘었으니
어찌하랴
좋던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네게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
자신을 성찰의 대상으로 삼아
내 젊음을 타자화한 내적 아이러니가 돋보이는 시로
‘너’의 실체는 몸입니다.
정신이 몸에서 빠져나와 몸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유체이탈 화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몸 / 나태주
아침저녁 맑은 물로
깨끗하게 닦아 주고
매만져 준다
당분간은 내가 신세지며
살아야 할 사글세방
밤이면 침대에 반듯이 눕혀
재워도 주고
낮이면 그럴듯한 옷으로
치장해 주기도 하고
더러는 병원이나 술집에도
데리고 다닌다
처음에는 내 집인줄 알았지
살다보니 그만 전셋집으로 바뀌더니
전셋돈이 자꾸만 오르는거야
견디다 못해 전셋돈 빼어
이제는 사글세로 사는 신세가 되었지
모아둔 돈은 줄어들고
방세는 점점 오르고
그러나 어쩌겠나
당분간은 내가 신세져야 할
나의 집
아침저녁 맑은 물로 깨끗하게
닦아 주고 매만져준다
시인은 몸을 집으로 생각했습니다.
몸을 잘 관리하면 집처럼 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집주인을 만나느냐에 따라
집에서는 향기가 나기도 하고 악취가 나기도 하지요.
집을 가꾸듯이 몸을 가꾼다면 몸에서도 향기가 나겠지요.
뒤적이다 / 이재무
망각에 익숙해진 나이
뒤적이는 일이 자주 생긴다
책을 읽어가다가 지나온 페이지를 뒤적이고
잃어버린 물건 때문에
거듭 동선을 뒤적이고
외출복이 마땅치 않아 옷장을 뒤적인다
바람이 풀잎을 뒤적이는 것을 보다가
햇살이 이파리를 뒤적이는 것을 보다가
달빛이 강물을 뒤적이는 것을 보다가
지난 사랑을 몰래 뒤적이기도 한다
뒤적인다는 것은
내 안에 너를 깊이 새겼다는 것
어제를 뒤적이는 일이 많은 자는
오늘 울고 있는 사람이다
새가 공중을 뒤적이며 날고 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뒤적일 일이 많아집니다.
어제를 뒤적이는 사람은 슬픔이 많아서입니다.
진취적인 사람은 뒤적일 필요가 없겠지요.
과수원 / 이재무
붉고 실한 열매 꿈꾼 적이 있다
스스로의 무게 못 이겨 떨어지는,
가을의 낙과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러나 성급한 주인은
열매의 열망 기다려주지 않는다
다 익기도 전에 가지를 떠나는
저 불그스레한 얼굴의 열매들
그들이 그렇게 떠나고 가지들은 갑자기
늙어간다 젊고 싱싱한 늦가을 햇살
과원의 슬레이트 지붕이나 달구고 있다
시월이 되면 곡식은 들판을,
과일과 단풍은 나뭇가지를 떠납니다.
배추도 텃밭을 떠나지요.
그래서 과수원은 시월에 가장 늙어 보이나 봅니다.
열매들이 사라져 갑자기 늙어진 과수원과
뜨겁게 지붕을 달구는 햇살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박완서님의 <엄마의 말뚝>을 공부했습니다.
작가의 자전적 소설인 이 작품에는
엄마의 이중심리가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시부모님의 살고 있는 송도 인근 박적골을 떠나
서울 사대문 밖에서 남매를 데리고 사는 엄마는
문밖 사람들을 무시하고 경멸합니다.
시부모의 한자 문화권에 비해 상것들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면서도 시부모를 존경하기는커녕
서울 근대 문명의 혜택과 동떨어져 살고 있는 시부모도 무시하는
엄마의 상호 모순되는 심리적 갈등이 잘 그려져 있습니다.
독자들은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 안에도
이런 반감과 콤플렉스라는 양가적 감정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어린 작가가 박적골을 떠나 서울에 가자마자 느낀 감정은
밀집 속에 존재하는 질서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말뚝은 뿌리, 근거입니다.
엄마는 사대문 안에 말뚝을 박는 것을 희망했고 결국 꿈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현저동을 그리워하는 엄마는 현저동 말뚝에서 결국 벗어나지 못합니다.
말뚝에 매단 끈의 길이만 멀어졌을 뿐이지요.
손녀딸과의 이별이 너무 슬퍼서 농바위 고개에서
손녀딸 볼기를 치면서 웬수라고 외치는 할머니의 모습에
우리는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박완서 작가와 어머니 그리고 할머니 삼대는 세상을 하직했지만
소설은 이렇게 우리 곁에 남아 심금을 울립니다.
일상 언어를 사용하고 대화체를 실감나게 표현한 박완서 작가는
항상 너무도 솔직한 여성 심리를 속임수 없이 드러냈습니다.
며느리, 조카 등등에 대한 이중적 감정을 여실히 드러낸
작가의 진솔함에 소름이 끼칠 정도이지요.
글 쓰는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점입니다.
시월의 마지막 날, 어지러운 시국과 함께
급강하한 온도가 더욱 마음을 움츠러들게 합니다.
우리는 몸을 잘 가꾸며 살고 있는지
말뚝을 제대로 박고 살고 있는지 반성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