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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나 치열하게 대들었을까요?    
글쓴이 : 한지황    16-10-10 18:45    조회 : 3,105

얼굴 / 이재무

 

주름 가득한

 

더운 날 부채 같은

 

미소에 잔물결 일고

 

대소에 밭고랑 생기는

 

바람에 강하고

 

물에 약한 창호지 같은

 

달빛 스민 빈방 천장 같은

 

뒤꼍에 고인 오후의 산그늘처럼 적막한

 

공책에 옮겨 쓴 경전 같은

 

 

이 시의 각 연 끝에는 얼굴이라는 말이 생략되어있습니다.

더운 여름날 그 얼굴만 쳐다보아도 시원해지는 부채 같은 얼굴,

작은 웃음인 미소에는 잔물결 일고

큰 웃음인 대소에는 밭고랑이 생기는 얼굴도 있지요.

바람에 강하다는 것은 시련을 잘 이겨낸다는 뜻이고

물에 약한 창호지 같다는 것은 인정에 약한 얼굴입니다.

달빛 스민 빈방 천장 같은 얼굴은

시골집 불이 다 꺼진 후 쓸쓸한 얼굴이고요.

몸이 추울 때 사람은 난로를 쬡니다.

마음이 춥고 외로울 때는 사람을 쪼여야 하지요.

바깥에 나와 우두커니 앉아있는 노인들은

오가는 행인들을 쬐기 위해서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가까이 쪼이면 화상을 입듯이 마음도 데이기 쉬우므로

거리를 두어야 하겠지요.

 

 

수직과 수평 / 이재무

 

 

수평은 수직이 만든 것이다

산의 수직 하늘의 수평을

해저의 수직 바다의 수평을

기둥의 수직 천장의 수평을

언덕의 수직 강물의 수평을

꽃대의 수직 꽃의 수평을

 

동이에 가득 담긴 물

이고 가는 그대의,

출렁출렁 넘칠 듯 아슬아슬한

사람의 수평도

마음속 벼랑이 이룬 것이다

 

수직의 고독이 없다면

수평의 고요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수직과 수평을 상대적, 대립적으로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절에 가면 커다란 기둥 아래 주춧돌이 있습니다.

사각의 주춧돌이 없다면 기둥은 세울 수 없습니다.

수직들이 외로움을 감당하기 때문에 수평이 존재합니다.

수직도 수평이 없으면 만들어지지 않지요.

그래서 수직, 수평 간에는 균형이 필요합니다.

 

 

 

 

/ 이재무

 

 

여기 님께서 하사하신 찰흙 한 덩이가 있습니다

 

가마솥이나 달구고, 엄한 돌칼이나 만지작대던

 

이 무딘 솜씨로 새삼 무엇을 빚으오리까

 

활활, 타는 장작불에

 

속이 훤한 항아리 하나 잘 지어내어서

 

굴뚝에서 멀어져 가는 연기 같은

 

솔숲 푸른 향기 담아 올리오리까

 

나무 한 그루 실하게 키워

 

먼지 많은 골목 속으로 두어 평 그늘을 드리울까요

 

새 한 마리 미끈하게 낳아

 

하늘을 썩 잘 날게 할까요

 

푸른 벌판 매일을 먹고도 늘 허기져 있는

 

검은 염소나 낳아 방목할까요

 

그도 아니면 발갛게 달아오른 꽃봉오리 벙글게 하고

 

오늘은 유난히 한가하셔서 콧구멍이나 후비고 있는

 

님의 눈 밝게 할까요

 

하지만 빚다가 빚다가

 

송편 같은 초승달은 거친 솜씨가 아퍼 마른 개떡이나 되고

 

빚을수록에 어디서 새끼 잃은 짐승의 목쉰 울음만 들려옵니다

 

차라리, 찰흙 속에 질퍽한 생 처박고 우니

 

누군가 나를 무엇으로나 빚어 세상에 내놓으시든지 말든지

 

여기, 님께서 평생의 벌로 내리신 찰흙 한 덩이가 있습니다

 

 

좋은 시를 빚으려다 좌절한 시인의 고통이 절절히 느껴져 오는 시입니다.

찰흙은 부드럽고 말캉말캉합니다.

만지면 만질수록 더욱 만지고 싶은 중독성이 있습니다.

감각적이고 물컹한 찰흙을 만지면서 상상력의 날개를 펴 봅니다.

그러다보면 대립, 경쟁, 갈등, 이해타산의 느낌은 사라집니다.

여성적 이미지가 강한 찰흙은 모성을 자극해서

어린 시절 엄마를 만지던 느낌도 가져다주고

엄마와 분리되기 전으로 돌아가기도 합니다.

소외, 분리된 현대인에게 찰흙은 위로와 안식을 전해줍니다.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시 세 편을 공부하며

한결 쌀쌀해진 가을 날씨에 움츠러든 마음에 위로를 받았습니다.


한국산문 권두 에세이 <시인과 정치인>에서

사람과 자연과 대상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쓸 수 있는 시와

사람과 사회현상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제대로 할 수 있는 정치가 닮았다는

도종환 시인이자 국회의원의 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치열하게 매달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

자신의 인생을 걸고 치열하게 대들지 않으면

하나마나 한 일이라는 점도 닮았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 집니다.

목숨을 걸 정도로 열심히 해야 한다는 사실.

과연 우리는 글을 쓸 때 얼마나 치열하게 대들었을까요?

 


공인영   16-10-10 21:05
    
몇주를 건너 벗들을 뵙고보니 깊은 가을 속입니다.
무더위가  정신없이 삶을 할퀴는가 싶더니  그 잔해를 껴안으며
어느새 우린 옷깃을 여미고 있습니다.
그러니 시간과 세월의 유한함을 우리가 수시로 기억해 낸다면
글쓰기뿐 아니라
생의 낭비도 줄이고 매사에 좀더 치열할 수도 있을 텐데요.
이제부터라도 그럴 수 있기를 반장님의 후기를 통해 다짐해보는데...
바로 그 깨우침이 또한 어느것도 쉽게 약속하기 주춤하게도 합니다그려 ^___^;

후기 잘 읽었습니다
반장님은 일관됨, 성실함 같은 단어를 매번 새기게 해주시니,
그걸 얻어갖는 일도 이 계절의 큰 수확입니다. 수고하셨어요.
남은 밤 편히 좀 쉬시고 내일, 전철이나 한번 같이 타실래요? ^___^

박래순 선생님 빨리 쾌유하시고 초엽 선생님도 기운 잃지 않도록 조리 잘 하세요.
오늘 결석하신 벗들 다음엔 꼭 뵙구요.  남은 계절,
무엇 하나쯤 치열하거나 거기 나의 자존을 걸고 미쳐볼 일이
우리 벗들께  들이닥치기를  빌어드립니다요~~~^__^ 담주에 봬요.
     
한지황   16-10-13 08:09
    
유난히 늦게 찾아온  가을이어서인지 하루 하루가 더 소중합니다.
가을에서만 느껴볼 수 있는 청량함을 가슴 깊이 빨아들이고 싶어요.
그 기운에 힘입어 치열하게 멋진 글을 뽑아낼 수 있다면 더 바랄게 없겠지요.
인영샘도 가을에 듬뿍 취해 아름다운 나날이 되세요!
진미경   16-10-12 15:02
    
반장님의 후기를 읽으려 들어왔다가 인영샘의 반가운 댓글을 보니 절로 미소지어져요.^^
한국산문에 실린 시인과 정치인을 읽고 부끄러움과 부러움을  동시에 느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치열함을 남의 것인양 바라봤지요.  힘들어질까봐 , 책임지기 싫어서....
그런 나에게 도종환님의 권두에세이는 꺼지지 않는 조명처럼 오래도록 남아있네요.
그런 울림있는 글을 쓰고 싶네요.

10월의 삼분의 일이 지나고 있습니다.
찬바람 일렁이는 오전엔 아메리카노 한 잔에 깨어나는 사랑으로 마음 가는 이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집니다. 추억 속의 도시락 편지, 많이 지겨웠던 행운의 편지, 국군 아재에게 보낸
위문편지. 그리고 군대간 아들에게 보낸 눈물의 편지도 생각납니다. 서랍 정리를 하다 발견한 20대의 연애편지가
그러했듯이 오늘 이 시간에도 그리운 사람에게 손이 떨리는 편지를 쓰고 싶어집니다.
     
한지황   16-10-13 08:17
    
10월이 반을 향하여 질주하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파오네요.
그만큼 애착이 가는  달인데 우리의 마음을 모른다는 듯 가버리다니.
도종환 시인의 시만큼이나 가슴에 와닿는 에세이를 읽고 여러 분들이 깨달음을 얻었나봐요.
글의 힘이 얼마나 큰지 알 것 같아요.
미경샘도 편지 형식의 수필 한 편, 어떠신지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