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 이재무
주름 가득한
더운 날 부채 같은
미소에 잔물결 일고
대소에 밭고랑 생기는
바람에 강하고
물에 약한 창호지 같은
달빛 스민 빈방 천장 같은
뒤꼍에 고인 오후의 산그늘처럼 적막한
공책에 옮겨 쓴 경전 같은
이 시의 각 연 끝에는 얼굴이라는 말이 생략되어있습니다.
더운 여름날 그 얼굴만 쳐다보아도 시원해지는 부채 같은 얼굴,
작은 웃음인 미소에는 잔물결 일고
큰 웃음인 대소에는 밭고랑이 생기는 얼굴도 있지요.
바람에 강하다는 것은 시련을 잘 이겨낸다는 뜻이고
물에 약한 창호지 같다는 것은 인정에 약한 얼굴입니다.
달빛 스민 빈방 천장 같은 얼굴은
시골집 불이 다 꺼진 후 쓸쓸한 얼굴이고요.
몸이 추울 때 사람은 난로를 쬡니다.
마음이 춥고 외로울 때는 사람을 쪼여야 하지요.
바깥에 나와 우두커니 앉아있는 노인들은
오가는 행인들을 쬐기 위해서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가까이 쪼이면 화상을 입듯이 마음도 데이기 쉬우므로
거리를 두어야 하겠지요.
수직과 수평 / 이재무
수평은 수직이 만든 것이다
산의 수직 하늘의 수평을
해저의 수직 바다의 수평을
기둥의 수직 천장의 수평을
언덕의 수직 강물의 수평을
꽃대의 수직 꽃의 수평을
동이에 가득 담긴 물
이고 가는 그대의,
출렁출렁 넘칠 듯 아슬아슬한
사람의 수평도
마음속 벼랑이 이룬 것이다
수직의 고독이 없다면
수평의 고요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수직과 수평을 상대적, 대립적으로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절에 가면 커다란 기둥 아래 주춧돌이 있습니다.
사각의 주춧돌이 없다면 기둥은 세울 수 없습니다.
수직들이 외로움을 감당하기 때문에 수평이 존재합니다.
수직도 수평이 없으면 만들어지지 않지요.
그래서 수직, 수평 간에는 균형이 필요합니다.
詩 / 이재무
여기 님께서 하사하신 찰흙 한 덩이가 있습니다
가마솥이나 달구고, 엄한 돌칼이나 만지작대던
이 무딘 솜씨로 새삼 무엇을 빚으오리까
활활, 타는 장작불에
속이 훤한 항아리 하나 잘 지어내어서
굴뚝에서 멀어져 가는 연기 같은
솔숲 푸른 향기 담아 올리오리까
나무 한 그루 실하게 키워
먼지 많은 골목 속으로 두어 평 그늘을 드리울까요
새 한 마리 미끈하게 낳아
하늘을 썩 잘 날게 할까요
푸른 벌판 매일을 먹고도 늘 허기져 있는
검은 염소나 낳아 방목할까요
그도 아니면 발갛게 달아오른 꽃봉오리 벙글게 하고
오늘은 유난히 한가하셔서 콧구멍이나 후비고 있는
님의 눈 밝게 할까요
하지만 빚다가 빚다가
송편 같은 초승달은 거친 솜씨가 아퍼 마른 개떡이나 되고
빚을수록에 어디서 새끼 잃은 짐승의 목쉰 울음만 들려옵니다
차라리, 찰흙 속에 질퍽한 생 처박고 우니
누군가 나를 무엇으로나 빚어 세상에 내놓으시든지 말든지
여기, 님께서 평생의 벌로 내리신 찰흙 한 덩이가 있습니다
좋은 시를 빚으려다 좌절한 시인의 고통이 절절히 느껴져 오는 시입니다.
찰흙은 부드럽고 말캉말캉합니다.
만지면 만질수록 더욱 만지고 싶은 중독성이 있습니다.
감각적이고 물컹한 찰흙을 만지면서 상상력의 날개를 펴 봅니다.
그러다보면 대립, 경쟁, 갈등, 이해타산의 느낌은 사라집니다.
여성적 이미지가 강한 찰흙은 모성을 자극해서
어린 시절 엄마를 만지던 느낌도 가져다주고
엄마와 분리되기 전으로 돌아가기도 합니다.
소외, 분리된 현대인에게 찰흙은 위로와 안식을 전해줍니다.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시 세 편을 공부하며
한결 쌀쌀해진 가을 날씨에 움츠러든 마음에 위로를 받았습니다.
한국산문 권두 에세이 <시인과 정치인>에서
사람과 자연과 대상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쓸 수 있는 시와
사람과 사회현상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제대로 할 수 있는 정치가 닮았다는
도종환 시인이자 국회의원의 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치열하게 매달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
자신의 인생을 걸고 치열하게 대들지 않으면
하나마나 한 일이라는 점도 닮았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 집니다.
목숨을 걸 정도로 열심히 해야 한다는 사실.
과연 우리는 글을 쓸 때 얼마나 치열하게 대들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