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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 뻗어 땅의 울음을 만져봅니다    
글쓴이 : 한지황    16-09-26 19:10    조회 : 3,151

비울음 / 이재무

 

비오는 밤 창문을 열어놓고

손을 뻗어 빗소리를 만져봅니다

가만히 소리의 결을 하나둘 헤아려봅니다

소리 속으로 들어 가봅니다

소리 속에 집 한 채를 지을까 궁리 합니다

기실 빗소리는 땅이 비를 빌려 우는 소리입니다

저렇게 밤새 울고 나면

내일 아침 땅은 한결 부드럽고

깨끗한 얼굴을 내보일 것입니다

비오는 밤 창문을 열어놓고

손 뻗어 땅의 울음을 만져봅니다

 

비를 만진다고 하면 시가 되지 않습니다

빗소리를 만진다는 것은 마음으로 만진다는 뜻이지요.

연못가에서 우는 개구리를 밟지 않으려고가 아닌

개구리 울음 소리를 밟지 않으려고 해야 시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비는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땅이나 나뭇가지가 내는 소리일 뿐입니다.

땅도 울고 싶을 때 비의 몸을 빌려서 운다고 생각한

시인의 상상력이 있었기에 시가 되었습니다.

주체 내면의 정서, 기억, 경험에 의해 사물이 굴절되어 나타나는 것이 시입니다.

시인의 정서와 변덕에는 책임이 없는 이유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이 정서를 카타르시한다고 했습니다.

울고 나면 건강해집니다.

비가 온 후 땅의 얼굴이 왜 깨끗한지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아침산책 / 이재무

 

비 다녀간 아침 산길

차돌처럼 단단해진 공기

새들의 음표는 통통 튀고

살 내린 산의 쇄골 뚜렷하고

골짝 물은 변성기 소년처럼

소리가 괄괄하다

아직 형상이 남아있는 발자국 하나

나뭇잎 사이로 떠오른 햇살에

젖은 몸 털고 있다

 

공기가 저온이 되면 사물은 딱딱해지지요.

날씨가 추울수록 소리도 커집니다.

낙엽이 떨어진 가을산은 가지만 앙상해서

몸이 말랐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렇게 시인의 상상력에서 출발하여

질서 있게 언어로 표현되는 것이 시입니다.

 

길 위의 식사 / 이재무

 

사발에 담긴 둥글고 따뜻한 밥 아니라

비닐 속에 든 각진 찬밥이다

둘러앉아 도란도란 함께 먹는 밥 아니라

가축이 사료를 삼키 듯

선 채로 혼자서 허겁지겁 먹는 밥이다

고수레도 아닌데 길 위에 밥알 흘리기도 하며 먹는 밥이다

반찬 없이 국물 없이 목메게 먹는 밥이다

울컥, 몸 안쪽에서 비릿한 설움 치밀어 올라오는 밥이다

피가 도는 밥이 아니라 으스스, 몸에 한기가 드는 밥이다

각진 찬밥은 삼각 김밥을 말합니다.

각이 졌다는 것은 대립관계로 둥근 사발이 훨씬 따뜻하게 느껴지지요.

허겁지겁 시간에 쫓겨서 먹는 밥이 맛이 있을 수 없겠지요.

얼굴반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럿이 굴러 앉아 식사를 하면

밥이 더 맛있다는 뜻입니다.

마주보는 얼굴들이 만찬 역할을 하니까요.

혼밥이 성행하는 요즘엔 사라져가는 말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클라우드 / 구름

 

나 한때 구름을 애모한 적이 있지

하늘 정원에서 장엄한 몽상이 감미롭던

황금의 시간대에는 지상의 가난이 슬프지 않았지

나 한때 구름의 신자로 산 적이 있지

신전에 꿇어앉아 세상 주유를 설교하는 구름의 복음 새겨 들었지

변신의 귀재인 그녀들을 재빠르게 마름질해

입은 바지로 숨차게 들길 달리던 시절

갑작스럽게 찾아온 열애로 내 몸은 자주 꽃을 피웠지

구름밭엔 얼마나 많은 비밀의 씨들이 살고 있는지

날마다 다른 형상을 꽃피우는 공중을

꿈꾸는 한 마리 새가 되어 자유로이 넘나들었지

그러나 나 이제 구름을 꿈꾸지 않네

이교도처럼 불신하며 구름에 속지 않으려 애쓸 뿐이네

2011313일 이후

구름은 내게 저주의 신이 되었네

내 마음 속 어머니의 나라에서 평화롭게 뛰놀던 몽상의

아이들 한꺼번에 자취 없이 사라져버렸네

 

지상에만 정원이 있지 않습니다.

형상이 자주 바꾸는 구름이기에 몽상을 닮았다고 시인은 생각했습니다.

황금의 시간대는 자유로이 몽상에 빠졌던 젊은 날을 말하지요.

몽상은 아이들처럼 순수합니다.

현실을 직시해야하는 요즘엔 더 이상 몽상을 할 수 없습니다.

2011313일은 후구시마 원전사고가 있던 날입니다.

그날 이후로 구름은 더 이상 몽상이 아니고 공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시 제목을 굳이 <구름>이라고 쓰지 않고 <클라우드>라 한 것은

이 시를 쓰기 전 관람했던 독일 시네마 <클라우드>(원전 사고를 소재로 다룬 영화)

묵시록적 이미지가 이 시를 쓰는데 영향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망각에 대한 경각심을 주기 위해 시인은 이 시를 썼습니다.

망각에 저항할 줄 모르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민족의 운명도 불길할 수 밖에 없다고 시인은 말하고 싶었습니다.

 

가을학기가 시작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네요.

시에 관심을 갖고 새로 오신 유희영님과 윤정숙님도

한 식구로서 정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시월 첫째 주는 개천절과 겹치는 바람에 휴강입니다.

청량한 가을 하늘을 많이 쳐다보는 시월 되세요!

 


진미경   16-09-27 12:20
    
반장님의 풍성한 후기는 다시 읽어도 좋아요!! 고맙습니다.
제 27회 소월시 문학상에 빛나는 시와 스승님의 최근 시도 공부했지요.
저자에게 배우니 큰 기쁨입니다. 매 주 다양한 커리큐럼으로  더 풍성해지니 힘이 납니다.
단편소설, 한국산문 공부, 산문집,시집 등 등 ....
새로오신 유희영님의 멘트에 웃음을 참느라 힘들었어요. 대박^^
앞으로 더 많은 웃음이 넘쳐나는 일산반을 기대합니다.
담 주는 개천절이라 휴강이니 두 주 후에 만나겠네요.
시월의 멋진 날이 기다려집니다.^^
한지황   16-09-29 13:09
    
웃을 수 있다는것은 언제나 좋지요.
웃음을 제공해주시는 분들에게 사랑을!ㅎ
가을비가 온종일 내리더니 아침 저녁 제법 쌀쌀해젰어요.
이 아름다운 가을이 하루라도 더 우리 곁에 머물러주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분들 마음도 그 어느 때보다도 풍성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