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흔히 저지르는
세상이 천사와 악마, 친구와 적, 선과 악으로만 되어있다는
이분법 적 사고는
우리에게 관용과 관대함 그리고 차이를 포용하는 역량이
심각하게 결여되어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오늘날 우리는 선과 악이 무너지는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반지의 제왕>>에서 추한 존재인 골룸이 원래는 호빗이었으며
괴물 오르크는 요정이었습니다.
우리가 완전히 다르다고 여겼던 존재들의 경계는
이렇게 불확실한 것이지요.
<<해리 포터의 아즈카반의 죄수>>에서도
해리가 악의 화신으로 생각했던 시리우스 블렉이
사실은 해리의 수호자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작가 롤랑은 변신의 모티프를 사용해
외양만으로 사물을 판단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이데거는 <<에술 작품의 근원>>에서
반 고흐의 헌 구두 그림에 대해 농부의 땀과 수고를
예술적으로 형상화한 한 쌍의 구두라고 썼습니다.
컬럼비아 대학 교수이자 미술관 큐레이터인 마이어 샤피로는
그 한 쌍의 구두는 농부의 것이 아니라
고흐가 목사로 일할 때 신었던 구두라고 반박했습니다.
‘하이데거와 샤피로의 논쟁’은
예술 작품의 근원에 대한 진실과 허위에 대한 논쟁으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해체 이론가 쟈크 데리다는 <<그림의 진실>>에서
두 개가 다 왼쪽 구두처럼 보인다고 지적함으로써
두 사람의 열띤 논쟁을 간단하게 해체했습니다.
그제야 사람들은 구두를 자세히 살펴보고
왼쪽 구두만 두 개 일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지요.
이 세상에 단 하나의 진실만 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깨우쳐 주는 일화입니다.
인간은 단순히 선과 악으로만 나누기에는
너무나 복합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타자를 판단할 때는 심리적 양상이나
사회적, 정치적 요인까지도 늘 고려해야 합니다.
세상은 천사와 악마로만 되어 있는 것이 아닌,
그 사이에 인간이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지요.
얀 마텔릐 <<파이 이야기>>는
타자와의 화해 및 차이의 포용의 필요성에 대해
소중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주인공 파이는 힌두교 신자이며 동시에 카톨릭 신자이자 이슬람교도입니다.
파이는 인도에서 캐나다로 가던 배가 침몰하자
뱅골 호랑이 파커와 함께 227일 동안 표류하면서
위험적인 타자인 호랑이를 적대시하지 않고
호랑이와 공존하는 방법을 배웁니다.
무섭고 사나운 호랑이가 자신의 목숨을 빼앗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에게 살아갈 힘을 준다는 아이러니칼한 사실을 발견하면서
파이는 정신적 및 현실적 측면 둘 다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이 작품은 항해를 회상하는 파이의 목소리와
그것을 독자들에게 들려주는 작가의 목소리
즉 두 개의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작품의 마지막에 파이는 사람들의 말과 당신의 말 중
어느 게 진실이냐는 질문에
그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라고 반문합니다.
결국 사람들은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듣기 때문에
절대적 진실이란 중요하지 않고.
더 나아가 하나의 진실 보다는 여러 개의 진실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다양성의 나라 인도는 불교, 회교, 천주교, 힌두교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곳입니다.
“신앙이란 방이 많은 집과도 같다.
방 하나에만 매달릴 필요가 없지 않은가“라고 말하는 파이의 말을 통해
우리는 다양성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로 정의되지 않는, 영원히 계속되는 그래서
무한한 가능성을 갖는 숫자인 파이라는 이름 또한
큰 상징성을 띠고 있습니다.
절대적이거나 고정된 것이 아무 것도 없고
모든 것이 흐릿하게 제시되는
<<파이 이야기>>는 경계를 허물고
이분법적 사고를 상실시킵니다.
심지어 파이의 회상조차도 절대적 진실은 아니라고 제시되는
이 소설을 통해 “절대적 진실에 대한 맹신은
쉽게 타자를 억압하는 도그마로 전락할 수 있다.“는 교훈을 얻습니다.
이상은 김성곤 한국번역원장님의 저서 <<새로운 환경 속의 문학과 독자>>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문학 작품을 통해 배운 타자와의 화해와 포용이
다양한 시각으로 글을 써야하는 우리들에게 큰 배움을 줍니다.
훌륭한 교재를 선택해주시고 가르쳐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