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 군사에게 포위되어 대패했을 때
달아나지 않고 자결한 초패왕 항우의 기개를 칭송한
<하일절구>라는 시가 있습니다.
‘어느 여름날에 노래하다’라고 번역되는 이 시는
남송시대의 시인이었던 이청조가 지은 시로
중국인들이 역사상 제일 좋아했던 영웅호걸이 항우였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역발산 기개세’는
‘산을 뽑을 만한 힘, 세상을 덮을만한 기상’을 가졌다는 뜻으로
항우의 초인적 힘과 기개를 나타내는 수식어입니다.
사면초가에서 애첩 우희와 함께 자살로써 파국을 맞이한,
고전적인 비극미학의 구조를 지닌 서사인 까닭에
항우는 우리나라에서도 인기가 높습니다.
이 영웅 서사시에서 가장 큰 감동은
비극적 사랑이 포함된 위대한 몰락입니다.
몰락의 낙차가 크면 클수록
우리는 가슴 떨리는 카타르시스를 느낍니다.
잔인무도함이 비극적 아름다움이 되며
숭고미까지도 있어 보입니다.
중국 오페라인 경극 레퍼토리 중에 가장 인기 있는 <패왕별희>는
바로 이 이야기를 극화한 것입니다.
그러나 항우는 위대한 영웅일까요?
항우의 눈부신 카리스마의 첫째 조건은 잔인무도함입니다.
진나라와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포로 20만을 학살한 항우는
대도살자였습니다.
한두 사람을 죽이면 살인자가 되지만
20만을 죽이는 자는 영웅이 되는 것일까요?
이성적으로는 수긍을 하지 않으면서도
어마어마한 카리스마에 압도당하여 오관이 붕괴되고
이성이 마비되는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악령 스탈린이 부활되고 있는 러시아에는
그의 대형 초상화가 재등장하고
동상들도 다시 세워지고 있습니다.
스탈린의 부활과 함께 그의 후계 세력들은 권토중래를 도모하고
스탈린 지배를 겪지 않은 젊은 세대는 무비판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항우처럼 그의 위대함의 본질은 잔혹함입니다.
대학살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는
먼 과거일로 막연한 추상으로만 존재할 뿐입니다.
제주 3.4 사건과 보도연맹사건에서 학살당한
무고한 민간인은 10만이 넘습니다.
그 학살의 최고 책임자인 이승만을 영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건국의 아버지라 칭하며 이승만 부활 운동을 펴기도 합니다.
우리는 소위 영웅으로 떠받들었던 위의 세 영웅들을
재해석해야하지 않을까요?
민중은 무엇이고 인간은 무엇입니까?
현기영 수필집<<소설가는 늙지 않는다>> 중 <반영웅론>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