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공원에서 보게 되는 자작나무는
추운 북방 지역의 자작나무를 따스한 기후로 옮겨 심은 까닭에
흰색도 그을음이 오른 듯 거무끄레하고
잎의 노란 단풍도 물색이 칙칙합니다.
마치 북방으로부터 잡혀 온 포로들처럼 힘이 없어 보입니다.
나무껍질에 기름이 많아 불에 태우면
자작자작 소리가 난다고 해서 자작나무라고 하지요.
바이칼 호수 근처에는 자작나무 숲이 많다고 합니다.
어느 날 TV 화면으로 보았던,
늦가을 노랗게 물든 자작나무 숲에 일진 진풍이 불어 닥쳐
수많은 나뭇잎들이 일시에 허공을 가득 메우면서
금빛 소낙비처럼 푸른 물 위로 쏟아지는 정경은
가슴 떨리는 아름다움이었습니다.
학창시절 단골 이발소에 걸려있던,
페인트로 서툴게 그린 소위 이발소 그림들이
러시아 화가의 자작나무 풍경을 서툴게 본뜬 복사품이었음을
그때 비로소 알았습니다.
흰 눈 속에 은빛의 벗은 몸으로 서 있는 모습이 아름다워
겨울나무라 부르기도 하는 자작나무는 러시아의 상징이어서,
그곳 시인들의 시에 자주 나타납니다.
세르게이 예세닌은 시 <자작나무>를 통해
‘새벽은 밭들과 잠들어 있는 쟁기들을 일깨우지만
자작나무에 가서는 혹시 깰까봐
은빛 가지들을 살며시 어루만지기만 한다. ‘며
새벽조차도 조심스러워하는 자작나무에 대한 외경심을 잘 표현했습니다.
자작나무를 향한 동경이 컸던 만큼 태백산 산행에서
처음으로 실물의 자작나무를 만났던 때의 기쁨은 무척 컸습니다.
자작나무의 은빛 줄기는 종잇장처럼 얇은 껍질들로 덮여 있었는데
기름이 많아 추위에도 강하고 비에 젖어도 불에 잘 탄다고
등산객 하나가 가르쳐 주었습니다.
조금 벗겨내 라이터를 불을 붙이니
그 얇은 껍질은 기름 먹은 종이처럼
길게 외줄기 그을음을 끌면서 타올랐습니다.
자작나무는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눈 덮인 흰 자작나무 숲에서 벌어지는 무서운 총격전,
그 흰 눈 위에 뿌려지는 붉은 피는 싫습니다.
4.3 항쟁 때처럼, 피난민들이 유격대와 함께 수난당하는 영화 <<디피이언스>를 보며
총성, 비명, 흰 눈위의 붉은 피, 널브러진 떼주검들의 장면들을 외면한 채,
그 뒤에 있는 자작나무 숲만을 바라봤던 까닭입니다.
지난주에 이어 현기영 소설가의 수필 <자작나무의 유혹>을
끝까지 읽어보았습니다.
장마가 끝나고 불볕더위에 다들 지친 듯합니다.
그래도 미래 어느 날엔 강렬한 태양이 그리울 때가 있지 않을까요?
멈출 줄 모르는 젊음의 열정을 닮은 저 태양을...
그런 이유로 이 여름도 한껏 사랑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