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으면 흙내가 고소해진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늙어 흙에 묻힐 때가 머지않았다는 뜻이지요.
죽음을 두려움이나 슬픔이 아닌 고소한 흙내로
흔연히 받아들였던 선인들의 풍류가 가슴을 파고 듭니다.
죽음이란 땅의 중력에 순응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허리는 굽어지고
고개는 자꾸 땅을 향하여 가까이 가니까요.
생흙을 밟으며 풀과 나무들에게 시선을 돌리게 되는 것도
흙으로 돌아가 내 몸을 구성하고 있던 원소들을
초록의 뿌리에게 내어줄 때를 예감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름을 몰랐던 풀과 나무들을 분간하여 이름을 불러주면
익명과 무명의 꺼풀을 벗고 개성의 빛나는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름을 아느냐 모르냐의 차이는 이렇게 큽니다.
사람이 꽃을 보기도 하고 꽃이 사람을 보기도 하면서
꽃과 사람 사이에는 감정이입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이름만 알고 실물은 본 적이 없던 것들을
우연히 발견했을 때의 기쁨도 큽니다.
프랑스 철학자이자 언어의 연금술사인 가스통 바슐라르가
그 험상궂은 가시들 때문에 ‘대지의 분노’라고 한 호랑가시나무를
한라산 밑 야초지에서 만났을 때,
마르셀 푸르스트가 그 화사한 아름다움을 공들여 묘사했던
아가위나무꽃 무더기를 강원도의 어느 시골집에서 만났을 때,
김유정의 소설에 나오는 동백나무,
그 노란 꽃무더기를 2월의 흰 눈 속에서 만나,
그것이 실은 생강나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 최초의 만남이 준 기쁨과 감각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 생생함으로 남아있습니다.
마치 그 거장들이 숨기고 있는 문학적 비밀까지 엿본 것 같은 느낌입니다.
이상은 현기영 소설가의 수필집 <<소설가는 죽지 않는다>> 중
<자작나무의 유혹>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자작나무의 유혹에 대해 말하기 앞서
소설가는 풀과 꽃 그리고 나무의 이름을 알아가는 것에 대한 기쁨을
상세하게 적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시인의 시 ‘꽃’이 떠오르는 수필의 앞부분을 읽으면서
소설가는 자작나무의 유혹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지네요.
다음 주에는 본격적으로 자작나무를 만나러 러시아로 달려가
<<닥터 지바고>>의 라라를 만나볼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