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인문학실전수필(06. 28, 목)
-상상력 수필 3제(종로반)
1. 수필의 상상력과 비센 아프리오리(강의 발췌)
-철학자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유명한 개념이 생각난다.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을 아우른 독일의 관념철학자 칸트는 인간사고의 기본 구조와 인식에 이르는 경로를 '선험적 지식(Wissen a priori)’으로 설명했다. 인간은 경험하지 않고도 사물과 현상의 인과성, 보편타당성에 대해 이해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인식의 수용 틀과 용량 또한 비슷하다는 것이다. 칸트의 개념은 인간에게 ‘내재한 상상력(innate imagination)’을 설명하는 데 있어 좋은 인유(引喩)가 될 수 있다. 칸트의 ‘선험적 지식’을 ‘상상력’으로 치환해보자.
-누구에게나 어떻게든 보고 배운 것이 있다. 동화책, 위인전, 명작문고, 초중고 교과서 등은 읽었다. 사회생활을 하며 이런저런 경험도 쌓았을 것이다. 이에 더해 경험하지 않은 사실도 유추와 추론으로 어느 정도 본질에 접근할 수 있으리라. 다만 상상력 또한 골치 아픈 사유를 동반하는 인식 체계이자 통로이므로 즐겨 사용하지 않을 뿐이다. 그러니 수필을 쓰며 누구에게나 본디부터 주어진 상상의 힘을 빌려 일상적 소재에서 의미를 걷어 올리고 미적 울림이 큰 주제로 형상화하면 어떨는지?
-다음은 상상의 힘을 빌려 쓴 수필의 용례이다. 편의상 나의 글을 발췌 인용한다. 나는 2차 대전 때 나치 독일의 전차병으로 참전한 적이 없다. 독일어를 전공하긴 했지만. 바다에도 몇 번 안 갔고 바닷속 깊은 곳을 탐사해본 적은 더더구나 없다. 어렸을 적 어른들이 물가에 가지 말라고 해서. 또 나는 상자 안에 갇힌 쥐를 구경하며 안타까워한 적은 있지만, 쥐가 되어보았거나 쥐의 입장에서 인간을 조롱한 적은 없다. 쥐띠에 태어나긴 했지만.
2. 상상력으로 쓴 수필 사례
#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독일 기갑사단이 최후의 반격을 준비하며 벨기에 접경 지역에 있는 쇠뿔 모양의 삼림지대인 '아르덴'으로 향한다. 추위에 언 병사들의 얼굴은 푸르뎅뎅하다. 탱크부대가 진격을 멈춘다. 눈발이 흩날리고 자작나무가 귀신 울음소리를 낸다. 탱크 뒤에 도열한 병사들이 입술을 들썩여 신입 전차병 시절 배운 군가(Panzerlied)를 부른다. 서치라이트 푸른 불빛이 구름에 반사돼 천지를 밝힌다. 철십자훈장을 목에 건 지휘 장교가 채찍을 들어 전방을 가리킨다. 포격이 시작된다. 찢어지는 굉음과 함께 수목이 잘려나가며 움푹움푹 구덩이가 파인다.
-<탱크>
# 바다의 은밀한 속살과 장기, 피돌기를 보려면 볕도 들지 않은 어두운 밑바닥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해파리 떼가 공정대처럼 낙하하고 날씬한 뱀장어가 악기의 현絃처럼 물길을 흩뜨리는 곳. 자줏빛 물풀이 미친 여자의 서러운 울음처럼 나풀대고, 덩치 큰 곰치는 미욱한 새색시처럼 바위틈 사이로 얼굴을 내민다. 강철 근육과 지옥의 눈을 가진 대왕문어가 마술보자기처럼 몸집을 오므렸다 펼치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검고 노랑 띠를 두른 잔 물고기 떼가 일사불란하게 방향전환 제식훈련을 펼치는 곳. 그곳에 물길의 본류, 해저의 정밀, 침묵하는 바다의 모습이 있으려니.
-<해변의 카프카>
# 종로3가 탑골공원. 쥐 한 마리가 뿔뿔 기어가자 작은 널빤지 벽이 나타난다. 작은 동물이 방향을 틀어 출구로 향한다. 구경꾼들이 손뼉을 치려는 순간, 미련한 쥐가 쪼르르 멀어지더니 다른 곳을 헤맨다. 짜증이 나려는 순간 설핏 의심이 든다. 쥐가 우리를 비웃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면 너희들이 웃고 재밌어한다는 말이지?" 그러고 보니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쥐가 얼핏 우리를 쳐다보았다. 쥐의 붉은 눈에 연민과 슬픔이 일렁였던 것 같기도 하다. 쥐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래, 내가 이처럼 망설이고 어쩔 줄 몰라 하면 되는 거야? 다음번엔 더 어려운 문제를 내보시지. 스프링 장치가 달린 쥐덫도 여기저기 설치해 놓고 말야.
-<쥐는 이렇게 말하였다>
3. 종로반 동정
-한국산문 교수들의 강의를 유튜브에 홍보용으로 띄울 촬영을 겸한 첫 번째 강의를 진행했다. 종로반 문우들 외 외부에서 ≪에세이스트≫ 이미서 교수, 이문봉 수필가, 정영기 수필가, 우성희 수필가 등이 참여했고, ≪한국산문≫에서는 설영신 이사장, 주기영 이사, 정충영 이사 등 20여 명이 참석해 한국산문 강의실이 꽉 찼다.
-평소 강의를 잘하던 사람도 기계의 눈을 들이대면 긴장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김창식 교수는 문학(수필)에서의 상상력과 칸트 철학의 핵심 개념인 '비센 아프리오리(선험적 지식, Wissen a priori)'를 연계한 강의를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하며 이해하기 쉽게 진행, 큰 호응을 끌어냈다. 난해하지 않을까 내심 걱정하였으나 말 그대로 기우였다. 주제를 벗어나지 않은 정제되고 심도 있는 문우들의 질문이 또한 ‘장마철 소나기처럼’ 쏟아졌고, 강의 내용을 되짚어 명확히 하는 보충 답변으로 이어졌다.
-강의 후 뒤풀이에서는 외부 인사들도 자리를 같이해 수필에서의 상상력의 한계와 적정선에 대한 수준 높은 대화가 격조 있게 이어졌다. 이야기는 영화로 음악으로 철학으로 가지를 쳐나갔다. 인간 능력의 한계와 발전은 어디까지인가? 연식(年式)이 오래되면 가진 능력이 퇴화한다는데 퇴영적 행태를 보이기는커녕 문우들의 총기가 나날이 더해 간다. 이 기세라면 종로반 문우들에 의해 한국 수필의 너비와 깊이를 확충하는 새로운 지평이 열리지 않을까 불안한(?) 예감이 엄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