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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삶이 좋은 죽음을 낳습니다 (일산반)    
글쓴이 : 한지황    18-06-25 19:39    조회 : 8,650

오뉴월 장마에 물외 크듯이,

쑥쑥 자라기만 하던 어린이가 열 살이 지나면

자신의 몸속에 숨어 있는 죽음을 의식하게 됩니다.

막연하지만 인생의 고민이 시작되는 나이가

바로 열 살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들이 열 살이었던 때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저마다 가졌던 심각한 고민거리를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죽음을 전혀 회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꼈을 때,

가슴을 파고드는 먹구름 같은 통증은 영혼의 통증입니다.

불시에 우리에게 왔다가 가버리는 이 통증은

인간이 유한한 존재이며, 죽음을 잊지 말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같은 의미의 라틴어 경구 메멘토 모리,

몸속에 죽음이 깃들어 있는 필멸의 존재인 우리에게

지나친 탐욕을 경계하라고 합니다.

불가에서도 인생은 한조각 구름이 일어나는 것과 같고,

죽음이란 구름이 스러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삶과 죽음은 일란성쌍둥이로

삶의 시작은 곧 죽음의 시작이기 때문에

산다는 것은 죽어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능금 속의 벌레처럼 몸이 만들어질 때 몸속에 죽음도 만들어지듯

우리 일생은 죽음이 기생한 숙주로서의 일생입니다.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우리의 선인들에게

죽음은 인생의 완성으로서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삶과 즐거움만 생각하고

죽음은 부정하고 미워합니다.

몸속에서 자라고 있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혐오합니다.

몸속의 암이 생물체이듯이

몸속의 죽음 또한 점점 커져 가는데

그에 대한 공포도 자라게 마련입니다.

자주 겪을수록 익숙해지는 일상들과는 달리

죽음은 생각할수록 새롭고, 두렵고,

전혀 길들여지지 않는, 언제나 생생한 공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몸속 죽음의 존재를 외면하고

어둠 즉 죽음을 내쫓고자 도시의 밤을 환하게 밝힙니다.

무한 성장의 이데올로기는 장수를 보장해줄 것 같은 환상을 갖게 하며

몸속 죽음의 성장에 맞설 테크놀로지의 성장을 기대합니다.

덕분에 늘어난 평균수명은 잠깐 동안의 연장일 뿐,

지는 해를 막을 도리는 없습니다.

목숨의 연장이 아닌 고통의 연장일 뿐이지요.

병원은 우리 몸의 탄생부터 죽음까지를 관장합니다.

 

죽음이 혐오의 대상이다 보니,

죽어가는 자도 주위로부터 소외됩니다.

무한경쟁의 사회는 죽어가는 자를 탈락자, 실패자로 치부합니다.

그래서 죽음은 무서운 얼굴, 낯선 얼굴로 나타나

정신과 혼을 완전히 마비시켜버립니다.

평소 죽음과 사귀어 길들이지 않은 탓에

영혼이 망가진 채 죽어가는 것이지요.

 

임종에 가까운 부모를 병원 모시는 관행은

부모를 격리시키는 꼴에 불과합니다.

낯선 사람들 속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는

죽음의 공포를 가중시킬 뿐입니다.

혐오의 대상이 되어버린 죽음은

장례식도 슬픔 없이 치러지게 만듭니다.

술 먹고 떠드는 이야기가 술집을 방불케 할 정도입니다.

 

지금 우리는 죽음을 배제하고 삶만 있게 하려는

천박한 사회 풍조에 살고 있습니다.

죽음을 외면하고 부정하기 때문에 모든 죽음은

누추하고 비정상적인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천박한 삶이 그러한 죽음을 낳고

좋은 삶이 좋은 죽음을 낳습니다.

자연스럽고 상냥하게 다가오는 죽음,

좋은 삶을 산 자에게 죽음은

그 삶의 완성으로서 죽음일 것입니다.

 

현기영 소설가의 수필 <메멘토 모리>를 읽으며

좋은 삶이 좋은 죽음을 낳는다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하루하루, 삶이라는 도자기를 잘 빚어간다면

점점 커져가는 죽음의 도자기도 잘 빚어질 것 갖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