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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홀리 노거수는 슬픈 증언자요, 애도자입니다.(일산반)    
글쓴이 : 한지황    18-06-18 18:53    조회 : 1,921

아름드리 해묵은 나무를 한 단어로 축약하여 부르는 노거수(老巨樹)

그 이름 덕분에 나무의 지위가 격상되는 듯합니다.

수많은 연륜이 형성해놓은 노거수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자태는

덧없는 인간에겐 놀라운 기적이고 스펙터클입니다.

초라한 구조를 가진 인간에 비해

노거수들은 아름답고 정교하고 아주 복잡한 구조를 가졌습니다.

애초 씨앗 속에 내장된 위대한 기획이

오랜 세월의 성장과 변화를 통해 위대한 결말을 낳는데,

늙을수록 장대해지고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그 아름다움은 인간의 언어로는 온전히 표현할 수 없으니

나무가 시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몸에 파란만장한 서사시가 아로새겨져 있기 때문이지요.

끝없이 반복된 승리와 패배, 인식과 역경으로서의 한 생애, 가뭄, 폭풍, 혹한,

그 혹독한 시련이 나무를 그토록 아름답게 만들어놓았을 것입니다.

 

화산섬 제주에는 그곳의 거친 풍토를 닮은,

기이한 형상의 노거수들이 곳곳에 보입니다.

대개 팽나무들이지요.

바람 센 해변 가까이 있는 것일수록

옆으로 널찍하게 퍼지는 이 나무들은

여름철 마을 정자나무로 사랑을 받고

더 해묵어 모양이 영물스러워진 신목은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고장 특유의 나무 형상은

그 나무가 뿌리내리고 있는 땅속의 지형을 반영합니다.

뿌리는 암석 투성이 땅속에서 무수히 다치면서 꼬이고,

뒤틀린 몸으로 물줄기를 찾아 사방으로 뻗어나가는데,

바로 그 역경과 시련이 나무 형상에 그대로 반영되는 것입니다.

노거수의 형상에 영향을 끼치는 또 하나의 요인은 겨울 하늬바람입니다.

그 차가운 강풍은 마무의 북쪽 가지들을 마구 두들기고 무질러서

마모된 상태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에 나무들은

거꾸로 세워놓은 버선처럼 기이한 형상을 하게 됩니다.

 

그 고장 중간 마을인 선홀리에는 불칸낭이란 이름의 노거수가 있습니다.

거꾸로 세워놓은 버선 형상인 이 노거수는

나무 전체의 절반이 고사목이 되어 있습니다.

불칸낭불탄 나무라는 제주 말로

68년 전 군토벌대의 방홧불에 온 마을이 불탈 때,

이 나무도 함께 불에 탔습니다.

몇 달 뒤, 간신히 살아남은 자들이 폐허에 돌아와 재건을 꾀할 때.

불타 죽은 줄만 알았던 그 늙은 후박나무도 검게 그을린 몸에서

새잎을 조금씩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산천의 거친 풍토를 닮아 성정이 투박하고 강인했던 선홀리 사람들은

불의를 도무지 싫어했습니다.

그들은 물론 짐승도 나무도 죽고

마을당의 수백 년 묵은 신목 두 그루도 타죽었지만

오직 그 후박나무만은 살아남아 그때 그 참사를 몸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때 그 떼죽음을 상상하면서 나무의 형상을 다시 한 번 바라보면,

거꾸로 세운 버선이 아니라 허리를 굽혀 절하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후박나무가 허리를 깊이 굽혀 죽은 자들에게 애도를 표하고 있습니다.

선홀리 노거수는 슬픈 증언자요, 애도자입니다.


현기영 소설가의 수필집 <<소설가는 늙지 않는다>> 중 한 편인 선홀리의 불칸낭에서 발췌




진미경   18-06-19 08:45
    
제주 선흘리의 불탄 나무가 주는 교훈에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노거수는 살아남은 증언자네요. 기이한 형상의 노거수들을 보며 생의 투지를
발견합니다. 나무만큼 강한 존재는 없다!  오늘의 깨달음입니다.
후기 쓰시느라 수고하신 반장님^^ 고맙습니다.
다음 주면 더 더워지겠지요. 그래도 초여름은 행복입니다. 화이팅^^
한지황   18-06-19 15:23
    
자칫 지나치기 쉬운 나무를 바라보며 깨달음을 얻는 것이야말로
문학을 하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자세이겠지요.
수필 한 편을 통해 노거수를 만나보고 작가가 얻은 깨달음을 얻으니
글의 소중함을 다시금 알게 되네요. 
사소한 것이라도 깊숙이 들여다 보겠다는 다짐도 해보고요.
청량한 초여름을 만끽하세요. 미경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