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acheZone
아이디    
비밀번호 
Home >  강의실 >  한국산문마당
  슬프지 않은 죽음, 완벽한 죽음입니다 (일산반)    
글쓴이 : 한지황    18-08-20 19:36    조회 : 2,704

영화 <초원의 빛>에서 여고생 역을 맡았던 나탈리 우드는

수업 중 워즈워스의 시 낭송을 들으며 자신에게 찾아온

격정적인 사랑의 감정에 휩싸여 교실을 뛰쳐나갑니다.

 

자연 속에서 순진무구하게 성장하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쓴 시를 통해

워즈워스는 그 시절 자연이 베풀어주었던 빛과 영광이

어른이 된 지금 닳고 닳은 일상 속으로 스러져버렸음을 한탄합니다.

그렇지만 슬퍼하지만 말고 그나마 남아있는 것에서 힘을 찾자고 합니다.

 

어린 시절의 그 빛을 만나기 위해

고향인 제주도를 자주 찾습니다.

메마른 도시생활은 심신을 고달프게 하고

고층 건물들 사이의 협곡에서 일어나는 왜곡된 바람은

을씨년스럽기만 합니다.

몸속에 갖혀 시들어가는 야성을 밖으로 내보내

풀을 뜯기기 위해 초원으로 가는 것입니다.

 

한라산 기슭 아래 올망졸망 오름들을 거느린 초원지대는

봄여름이면 초록빛이, 늦가을에는 누런 금빛이

무제한의 큰 붓질로 채색되어집니다.

 

초원은 질펀한 적막 속에 누워있습니다.

늦가을의 초원은 누렇게 물들어가는 중입니다.

애틋함과 간절함의 감각을 일깨우려고 안간힘 쓰면서 꽃에 눈을 맞추면

꽃도 나를 바라보며, 달콤한 향기와 함께

너는 누구냐고 말을 걸어오는 것 같습니다.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풀숲에는 온갖 풀씨들이 여물어가고

풀벌레 소리들이 아지랑이처럼 자욱하게 떠 있습니다.

시끄러운 풀벌레 소리와 물컥물컥 풍겨오는

독한 풀냄새에 취해 정신이 멍해지기도 하고,

풀숲을 헤치고 나갈 때마다 풀벌레들은 일시에 합창을 멈추어

낯선 정적을 만들어내곤 합니다.

 

아이 시절엔 무덤의 잔디 위에서 씨름도 하고 뒹굴면서 놀았지만

지금은 몸속의 죽음을 다스리기 위해 잔디 위에 몸을 눕혀봅니다.

평온한 침묵 속에 낮에는 햇빛이,

밤에는 별빛이 무덤을 지킬 터이니

무덤가의 죽음은 오히려 그 푹신한 잔디처럼

부드럽고 상냥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독일민요에도 세상에서 가장 놀기 좋은 곳은 무덤가라고 했습니다.

 

누운 내 몸 위로 한 덩어리의 푹신함 흰 구름이 낮게 내려와

레그혼 암탉이 알을 품듯이 나를 품습니다.

가득 밀려오는 풀벌레 소리는 정적을 더 강조하고

나 혼자라는 생각, 외롭다는 생각은

내가 도시를 등지고 온 것이 아니라

도시가 나를 저버린 것처럼 외롭게 만듭니다.

 

개자리풀 위에는 손으로 건드려도 날아가지 않는

여치 한 마리가 있습니다.

실날같이 가는 다리들을 바르르 떨고 있는 걸로 봐서

죽음이 임박한 모양입니다.

초록색 여치는 풀과 동색입니다.

그들은 같은 운명으로, 죽어가고 있는 여치의 뒤를 이어

개자리풀도 곧 시들어버릴 것입니다.

 

 

개자리도 여치도 인간인 나도 유전자 수가 비슷한

한갓 미물일 뿐이라는 생각에

나는 무덤 속에 묻힌 나 자신을 상상해봅니다.

시간이 흐르면 나의 시신은 육탈되어 오롯이 뼈들만 남아 있을 것입니다.

몸과 영혼은 용해되어 흙 속에 스며들고 흙 속에 스며든 몸과 영혼을

초록의 뿌리가 빨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무덤가의 잔디와 곤충들에게도

인간의 몸과 영혼이 깃들어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경건한 마음으로 여치의 임종을 지키는 동안

여치는 옆으로, 가볍게 기울어집니다.

가는 다리들에 최후의 경련이 일어납니다.

정적, 온 세계가 숨을 죽여 그 죽음을 지켜봅니다.

여치는 깊은 적막 속으로 들어갑니다.

슬프지 않은 죽음, 완벽한 죽음입니다.


   현기영 소설가의 수필 <초원의 빛>에서 발췌




유병숙   18-08-21 07:55
    
반장님의 후기로 다시 복습합니다.
한 문장 한 문장이 시로 읽힙니다.
내용 뿐만 아니라  문체가 아름답습니다.
매 주 이렇게 책을 읽는 것 만으로도 문학 수업이 저절로 된다면~~^^
땡큐입니다~~!!!
문우님들의 열독에 편승해서 지내다 보니 벌써 여름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소리가 진짜로 들리면?
퀴즈입니다.~~^^
즐거운 방학 되시기 바랍니다.
한지황   18-08-21 09:01
    
병원 가야지요.ㅎ
맘껏 상상력을 펼쳐도 병원 가보란 소리를 안 하는 문우들과
환상의 나라를 여행하는 재미로 유난히 더웠던 여름 학기를  잘 보냈습니다.
귀뚜라미들이 관현악을 연주하는 가을 학기에도 우리들은 상상의 날개짓을 멈추지 않겠지요.
조만간 넘어갈 가을의 문턱을 바라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