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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장고 앞에서 렉 걸린 오뎅    
글쓴이 : 박나영    26-10-05 09:11    조회 : 1,556

공든 탑이 무너지랴.

싱크대에는 어제 야식의 잔재와 오늘 점심의 사투가 층층이 쌓여 ‘공든 탑’을 이뤘다. 

아이 간식을 주려 접시 하나를 슬쩍 빼내려니, 그릇들이 ‘채채챙’ 날카로운 비명을 지른다. 시작도안 할 거면 건드리지 마!

“아, 몰라, 때려쳐.”

과자봉지 하나 통째로 던져주고 만다.

매일 해야 하는 일은 나에게 고역이다. 시작도 안 했는데 가슴부터 답답해지고, 휴우 한숨이 삐져나온다. 

20분이면 끝낼 일을 나는 왜 하루종일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만 돌리고 있는 걸까. 그러다 보면 더 하기 싫어지는 걸. 저기 쌓인 빨래마저 나를 째려 보고 있다. 싫다 싫어. 꿈도 사랑도. 싫다 싫어 생각을 말자. 하아.

내 뇌는 지금 도파민 가뭄 상태다. 

설거지나 빨래 같은 ‘해도 티 안 나고 안 하면 티 나는 일’에는 쥐어짜내도 도파민이 한 방울도 나오질 않는단 말이다.

그래도... 씻어 논 그릇이 있어야 저녁을 먹잖아. 한숨을 푹푹 내쉬며 식탁에서 무거운 몸을 일으켜 멀고도 먼 싱크대 쪽으로 향하는데... 

뜨아. 도저히 못하겠다. 그대로 휙 지나쳐 커피 머신 앞에 선다. 일단 커피 먼저 마시고 볼 일이다. 

설거지 탑이 무너지기 전에 내 멘탈이 먼저 무너질 것 같으니까. 죽어도 (아니면 죽도록) 하기 싫은 이 집안일에서 도파민이 뿜어져 나올 수는 없을까?

고등학교 가사 시간이 떠오른다. 저고리 바느질이 얼마나 답답했던지 옥상에 올라가 소리를 지를 정도였다. 

결국 엉망진창인 결과물로 겨우 기본 점수만 받았던 기억. 

삼십 년이 지난 지금, 나는 여전히 가정주부로서 ‘기본 점수’만 간신히 받으며 버티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데 주부에게도 졸업이라는 게 있긴 한 걸까. 이 지겨운 바느질 같은 일상을 끝내고 당당히 졸업장을 손에 쥘 날이 오기는 할까.

 

 학교 가는 아이 아침은 빵, 떡, 아니면 주먹밥.

남편은 이미 출근했다. 어젯밤 남편이 시켜 먹은 배달 용기는 싱크대 위 널부러져 뭘 먹었는지 말 안 해도 다 알게 한다.

냉장고를 열면 먹다 만 햇반의 비닐 뚜껑이 요염하게 어깨를 내리고 있다.

아이를 보내고 난 후, 점심은 혼자다. 남은 배달 음식, 아니면 김밥.

혼자 먹는 점심 메뉴까지 고민하고 싶지 않다구!

그리고 다가온 저녁. 아이랑 둘이 있을 땐 돈까스, 미역국, 계란찜이 또 빙글빙글 돌고 돈다. (하루에 세 끼나 먹으라는 건 누가 정한 걸까!)

고민은 남편까지 집에 있는 날이다.

야근하고 늦게 오는 날엔, 조금만 부지런을 떨면 밥을 차려줄 수 있는데…. 그걸 못하고 잠든 ‘척‘한 적도 많다. (남편, 미안)

하지만 주말은 어김없이 다가온다!

남편이 있을 땐 갑자기 메뉴 난이도가 자이로드롭을 탄다.

나는 냉장고 문 앞에서 생각하는 오뎅이 된다.

분명 냉장고 속에 재료는 가득한데, 뭘 할 수 있는지 더하고 빼고 계산이 안 나온다.

요리는 분명 이과의 영역이다. 나는 뼛속까지 문과.

밥하는 게 힘든 게 아니다. 뭘 먹을지 정하는 게 힘든 거다. 짜장? 짬뽕? 고르는 문제가 아니다. 

냉장고에 뭐 있지? 유통기한 지났나? 애는 또 안 먹는다고 할 텐데…. 돈까스는 어제 먹었으니 안되고…. 아, 벌써 피곤해.

나에게 메뉴 고민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여러 변수를 동시에 계산해야 하는 아주 고차원적인 노동이다! 

나는 생각이 많이 드는 일이 특히 힘든 사람인데 말이다. (나는 ADHD라구!)

누군가 우리 집 냉장고에 있는 재료로 메뉴를 정해준다면, 그래도 할 만할 것 같은데, 그런 사람은? 당연히 없지.

가끔은 기적 같은 날도 있다. 애호박, 계란, 두부를 보고 메뉴가 번뜩 떠오른다.

“오늘은 모둠전이다!”(부침가루는 아직 모른다)

오늘은 그날이 아닌가 보다. 생각하는 오뎅이 짧은 다리를 풀고 어렵게 입을 연다.

“여보, 혹시 먹고 싶은 거…. 있어?”

그러면 늘 비슷한 대답을 하는 남편.

“음…. 회 먹은 지 좀 되지 않았어?

……!

그놈의 회. 애증의 메뉴다.

마땅히 먹을 게 없을 때마다 회를 시키는 우리는 부르주아 가족. 

주문조차 할인쿠폰을 기가 막히게 쓰는 남편에게 넘기고. 25분 후, 오늘의 셰프가 도착했다. 별점 다섯 개짜리.

“왔다!”

배달 음식 비닐 뜯고, 용기 뚜껑 열고, 플라스틱 그릇을 식탁에 줄 세운다. 비닐 뜯는 손이 용감하고 재빠르다.

“어…. 이게 다야? 얼마야, 이거?”

“3만 5천 원.”

“이게 3만 5천이라고? 세상에….”

잔인한 물가에 입이 벌어지지만 설거지는 없으니 내 인건비 아낀 걸로 퉁치자.

 

 매일 저녁, 뭐 먹지, 뭐 먹지가 도돌이표처럼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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