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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빛 쑥 더미    
글쓴이 : 최경묵    26-04-14 15:44    조회 : 32
은빛 쑥 더미

최경묵

  지금 사는 집에서 지낸 지도 벌써 7년째가 되었다. 이 집을 선택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해가 지기 전까지 종일 집안에 햇빛이 잘 들어서였다. 여름에 이사오고 나서 이듬해 봄이 되었을 때다. 이곳에서는 4월은 지나야 쑥이 손가락 한마디 길이쯤 올라온다. 집 주변에도, 동네 길가에 키 짧은 쑥이 퍼져 있다. 그러다 여름비를 맞으면 성인의 어깨높이까지 올라와 예초기에 한번 잘리고, 추석을 앞두고 그보다 더 자란 쑥은 또 한 번 잘린다. 
  그 연한 쑥이 자라기 시작할 무렵이면, 유난히 어떤 기억과 느낌에 사로잡히곤 했다. 마치 그것에 푹 빠진 것처럼, 무엇을 하고 있어도 그 느낌은 계속 나를 따라 다녔다. 나를 감싸고 도는 따뜻하고도 짙은 감정에 대한 기억에 마치 덴 듯했다. 나를 꼭 붙들어메 놓는 것 같은 그 무엇을 또렷하게 알 수는 없었다. 추위가 완전히 물러가고 난 뒤에 봄 햇살이 내리기 시작하면 그랬다. 엄마는 햇살을 받고 고개를 내민 연한 쑥을 해마다 뜯어 쑥개떡을 만들어 주곤 했다. 엄마와 그에 맞물린 기억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다음 해에도 또 그다음 해에도, 아마 삼사 년 동안은 그랬던 것 같다.
  봄 햇살과 봄 쑥은 그맘때면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흔한 모습이다. 양지바르고 사람의 손길이 잘 닿지 않는 곳이면 은빛의 쑥 무더기가 자락자락 봄바람을 맞고 있다. 그럴 때면 밝고도 따뜻함이 온몸에 물들 듯 퍼지면서 마음 한구석이 데인 듯 멍해지면, 나에게 또 한해의 봄이 찾아온 것이었다. 지금은 미국 남부 아칸소의 어느 전원에 살고 있는 언니가 언젠가 그랬다. 캘리포니아주의 샌디에이고에서 십 년 남짓 지내다 동북쪽 위스콘신의 밀워키로 이사하고 나서 나를 한동안 귀찮게 한 적이 있었다. 겨울에도 따뜻한 곳에서 지내다 사계절이 뚜렷해진 곳에서 지내게 되니 가을만 되면 마음이 이상해진다고 했다. 그런 언니에게서 전화가 오면 두 시간이 지나도록 통화가 이어지곤 했다. 요즘은 따로 요금이 들지 않아도 가능하지만, 그때쯤에는 그전보다 국제전화 요금이 절반 이상은 내렸다 해도 비용이 어느 정도는 들 때였다. 
  나보다 아홉 살 많은 언니와는, 비슷한 연령대로서의 공감되는 부분을 함께 나눈다기보다 오래도록 엇갈려서 지내왔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지내는 곳이 지구의 반대편이니, 어쩔 수 없다해도 슬픈 일이다. 나는 최근 들어서야 그때의 언니 심정을 온전히 공감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주 오래전의 별빛을 밤하늘에서 이제야 만나는 것처럼. 물론 언니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준 얘기를 나름 진지하게 혹은 재미나게 듣곤 했다. 시간과 공간이 엇갈리는 상황에서 갈등이나 오해가 생겼을 때는 하늘에 떠 있는 별을 보는 것처럼 막막했다. 아버지마저 돌아가시고 난 후, 나는 하나뿐인 언니가 나를 더 이해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 두드러졌다. 그런 나의 표현이, 언니에게는 동생인 내가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한 부분에 대한 기억이 불쑥 고개 들었던 것 모양이다. 그러고도 육 년 가까이 대화하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언니는 계속 나와 대화하려고 애를 썼고, 나는 어떤 핑계를 대서 대화를 거부했었다. 그 사이에 몇 번의 진지한 대화 시도가 어그러졌던 시간까지 합치면 그랬다. 어쩌면 그 시간은 언니와 나의 어긋나 있던 부분이 자리 잡는 데 시간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서로 공감하고 공유하기 위해 더하거나 덜어낼 것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덜어낼 것이 더 많았던 것 같지만 말이다. 어긋난 뼈를 맞추고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당연하겠지만, 어긋난 마음이 치유되는 동안은 결코 편안할 수 없었다. 고통스러웠고 그 시간을 참고 견뎌야 했다. 그것이 안정을 찾아가는 데 시간과 에너지가 소모되는 법이니까. 어떤 것에 꽂히면 고집스럽게 응대하곤 하던 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고집이 필요한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한참 흐르고 나서, 가을이 되면 마음이 이상해진다던 언니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언니 마음속의 어떤 부분이 그대로 느껴졌다. 돌아보면 조금은 창피한 마음도 든다.

  사랑이라는 책임감이 말없이 곁에서 나를 기다려줬다는 것을 안다. 내가 언니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과 언니도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마음만이, 긴 시간 뒤에 남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봄 앓이가 끌어올린 언니의 가을 앓이가 떠돌다가 이제야 제자리를 찾은 것 같다. 나도 그때의 엄마처럼 봄 햇살을 담뿍 받고 있는 은색의 쑥 더미를 토닥거린다. 희한하게도 성인이 된 딸아이가 따뜻한 어느 봄날 엄마의 쑥개떡이 생각난다고 한다.(2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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