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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인생의 첫 번째 플레이리스트    
글쓴이 : 서동관    26-05-16 12:02    조회 : 191

내 인생의 첫 번째 플레이리스트

서동관


3년 전 이곳으로 이사 오면서 가지고 다니던 오래된 박스들을 사무실 뒤쪽 창고 한편에 쌓아 두었다. 얼마 전 무언가를 찾기 위해 그 박스들을 열어 보게 되었다. 첫 번째 박스에 이어 두 번째 박스를 열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모를 그 박스 안에는 층층이 빼곡하게 쌓인 카세트테이프들이 보였다. 카세트테이프 몇 개를 뒤적거리자 숨어있던 꿉꿉한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와 코를 찔렀다. 손때 묻은 케이스, 흐릿하게 남아 있는 곡목들. 일부는 곡명이 적힌 스티커가 떨어져 너덜거렸다. 그중 눈에 띄는 분홍색 테이프를 하나 집어 들자 SS전자 앞에 열여섯 살의 어린 내가 서 있었다.

국민학교 때까지는 흘러나오는 음악만 들었다면,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노래에 대한 관심이 커져서 음악을 스스로 찾아 듣게 되었다. 그런 관심은 새로운 노래에 빠르게 접근하고 싶은 열망으로 이어졌다. 언젠가부터 좋아하는 노래 제목을 20여 개 적어서 레코드점에 가져다주면 2,000원을 받고 공테이프에 노래를 녹음해 주는 서비스가 있었다. 요즘 말로 하자면 플레이리스트라고 할 수 있다. 돈을 받고 원하는 노래를 녹음해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1986년 당시 충청남도 서산에는 'SS전자'라는 레코드점이 있었다. 그곳을 지날 때면 항상 음악이 흘러나왔고, 좋아하는 노래가 들리면 자연스레 발걸음을 멈추고 듣곤 했다.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안을 들여다보면, 팝 전문 DJ였던 김기덕을 90퍼센트쯤 닮고 눈매가 매서웠던 주인 아저씨가 항상 서 있었다. 지금이야 가게 주인을 ‘사장님’이라고 부르지만, 그때는 ‘아저씨’라고 불렀다.

용돈이 귀해서 추석을 기다렸고, 추석이 지나자마자 난생처음 최신 가요 테이프를 구입하기 위해 SS전자 앞에 섰다. 문고리를 잡고 잠깐 멈추어 서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문을 밀고 들어가니 출입문 정면에 아저씨가 서 있었다. 아저씨 뒤쪽에는 다양한 음향 가전이 진열되어 있었고, 왼쪽에는 레코드 음반이, 오른쪽에는 카세트 테이프가 진열되어 있었다. 밖에서 보던 가게와 안은 천지차이였다. 안에서 듣는 음악 소리는 온몸을 휘감다가 몸속으로 파고드는 것만 같았다. 처음 방문한 터라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 아저씨에게 물었다.

"아저씨, 최신가요 테이프는 어느 쪽에 있어요?"

"응, 요 앞에 있는 게 모두 최신가요 테이프니까 골라 봐."

나는 아저씨가 손으로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20여 개의 최신가요 테이프가 한 줄로 진열되어 있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표정으로 테이프를 한 장씩 들었다 놓기를 반복하며 추려 보았다. 오랜 망설임 끝에 후보 테이프를 세 개로 압축했다. 거의 30분은 걸린 것 같다. 하지만 세 개에서 하나를 고르는 것은 더욱 어려웠고, 고르지 못하고 번갈아 보기를 또 30분째 반복했다. 거의 한 시간 동안 테이프 하나를 고르지 못하고 있었고, 이를 지켜보던 아저씨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왜? 못 고르겠어?"

"네, 제가 좋아하는 노래가 하나씩 빠져 있어요."

"그래? 무슨 노래가 빠져 있는데?"

"이 테이프에 좋아하는 노래가 가장 많이 들어있는데, 하필이면 가장 좋아하는 임병수의 '아이스크림 사랑'이 없어요."

"그럼 이 테이프에 임병수가 부른 '아이스크림 사랑'만 있으면 된다는 거지?"

"네, 그 노래만 있으면 이걸로 사고 싶어요."

"근데 이 테이프에 녹음해야 하니까 비용이 200원 추가되는데, 괜찮겠어?"

"와, 그게 된다는 거죠? 그럼 해 주세요. 1,200원에 200원 더 드리면 되는 거죠?"

김기덕을 닮은 아저씨는 매서운 눈매와는 달리 다정했고, 오랜 기다림에 지칠 만도 했을 텐데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그렇게 해서 내 마음에 꼭 드는 1,400원짜리 최신가요 테이프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더군다나 그곳에 진열된 테이프는 무채색 일색이었는데, 분홍색 테이프라 색깔마저 마음에 쏙 들었다. 아저씨는 테이프를 건네며 말했다. "듣고 싶은 노래가 있으면 적어 와. 공 테이프에 녹음해 줄 수 있어. 앞뒷면 18곡 정도 녹음되는데 혹시나 찾는 노래가 없을 수도 있으니 두 곡 정도 후보곡도 같이 적어 와야 해."

"가격은 얼마예요?"

"2,000원." 

2,000원이면 당시 내가 좋아하던 까만소라면 열여덟 개를 살 수 있었다. 학생에게는 적지 않은 돈이었다. 노래 한 곡이 나의 한 끼인 셈이었다. 좋아하는 노래들로만 카세트테이프를 만들어준다는 말 한마디가 나를 고민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그날부터 연습장을 펼쳐 놓고 선곡을 시작했다. 선곡은 단순히 취향에 맞춘 고르기가 아니었다. 원석을 찾고 보석으로 다듬는 신중한 작업이었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노는 것조차 미루고 후보곡을 넣었다가 빼기를 반복하며 곡목을 추려나갔다. 노래가 떠오르지 않으면 친구들에게 좋은 노래를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고, 친구가 멜로디를 흥얼거리면 그 선율을 따라가며 기억 속에서 숨어 있던 노래를 하나씩 끄집어내기도 했다. 80년대 초반의 가요,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반의 팝송, 영화 OST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 100여 곡이 후보군에 올랐다. 그중에서 스무 곡을 고르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장장 사흘에 걸친 작업이었다.

드디어 각고 끝에 내가 듣고 싶었던 스무 곡을 골랐다. 최신가요를 선택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생일대의 선택을 해낸 것이다. 스프링노트에 본곡 18곡에 숫자를 붙여 순서대로 적고, 본곡만큼이나 고심했던 후보곡 2곡을 아래에 덧붙여 SS전자로 향했다. 메모지를 건네받은 아저씨는 플레이리스트를 보더니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사흘 후에 찾으러 와."

"몇 시에 오면 되나요?"

"4시 이후에 오면 될 것 같다."

"제발, 앞에 있는 열여덟 곡이 꼭 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래. 노래 찾아서 있으면 꼭 넣어줄게."

SS전자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세상의 시간은 멈춰 버렸다. 아니, 내 시간만 그대로 얼어붙은 것이다. 사흘을 기다리는 시간은 내게 3년과도 같았다. 열여덟 곡이 모두 빠짐없이 차례대로 들어갔을까? 만약 빠졌다면 어떤 곡이 빠지고 어떤 곡이 들어갔을까? 앞면만큼은 빠지는 노래가 없어야 할 텐데... 쓸모없는 걱정으로 시간은 멈춰 있고, 마음만 쪼그라들었다. 드디어 기나긴 사흘이 지나고 오후 4시가 되었다. 기다리다 지친 터라 조금 일찍 나왔지만, 시간에 맞춰 가기 위해 걸음 속도를 조절해야만 했다. SS전자에 도착했다. 나를 알아본, 김기덕을 닮은 아저씨가 선반 아래에서 테이프 하나를 꺼내 들었다.

"테이프 여기 있다."

"열여덟 곡 중에 빠진 거 있어요?"
나는 다급하게 물었다.

"노래가 순서대로 다 들어갔다." 

그 말 한마디에 쪼그라들었던 마음이 확 풀렸다. 살아온 열여섯 해 인생 중 가장 기뻤던 날이 아닐까 싶다. 테이프를 건네받고 가게를 나오니 세상이 아름다워 보였다. TV에서 가끔 세상이 아름답다는 표현을 들었는데, 그 말의 뜻을 비로소 알 것 같았다. 구름 위를 달리는 기분으로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전축에 전원을 켜고 방금 가져온 녹음 테이프를 넣은 후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그 순간 첫 곡으로 설정한 스타워즈 OST 메인 테마가 웅장하게 흘러나왔다. 내 첫 플레이리스트를 여는 음악으로는 이것보다 더 좋은 게 없다고 생각했다. 심장은 미칠 듯이 뛰었고, 기분은 말할 수 없이 좋았다. 그동안 고민했던 시간을 통째로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만을 모아서 들을 수 있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녹음 테이프를 만들고 난 후부터 음악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졌다. 음악을 선택하고 배열하는 과정이 하나의 의식이자 창작이 되어버렸다. 어떤 노래를 먼저 듣고 싶은지, 어떤 노래 다음에 무슨 노래가 나와야 감정의 흐름이 좋은지 생각하게 되었다. 음악을 다루는 마음이 기타를 튜닝하는 손만큼이나 정교해졌다. 나는 그때의 음악을 지금도 즐기고 있다. 어릴 때의 기억 때문인지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SS전자의 문을 열고 들어서던 열여섯 살의 내가 떠오른다. 사흘을 기다리며 가슴을 졸이던 그 마음과 함께 말이다.

지금은 원하는 노래, 원하는 부분을 손끝 하나로 찾아 듣는 시대가 되었지만, 그때처럼 한 곡 한 곡을 떠올리며 앞에 노래가 지나가야 뒤에 노래를 만날 수 있는 기다림의 낭만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어쩌면 우리가 무언가를 오래 기억하는 것은 원하는 것을 만나기 위해 공들인 시간과 인내심 때문이 아닐까? 2026년 4월에도 SS전자 앞을 지나고 있다. 간판은 바뀌고 다른 업종이 들어서도 그 자리는 아직도 나에게 SS전자다. 그리고 그곳에 담긴 음악은 여전히 낡은 녹음 테이프 안에서 긴 꿈을 꾸며 나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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