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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지막이 그러나 단단하게    
글쓴이 : 김희정    26-07-25 08:33    조회 : 13

                                              나지막이 그러나 단단하게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을 만나면 인사처럼 물어보는 말이 있다. “MBTI가 뭐예요?” 답을 하긴 하지만 정해진 유형만으로 복잡한 인간의 내면을 규정하는 것이 그렇게 달갑지는 않다. 또 알고 나면 사람에 대한 선입견이 생기기도 한다. 그 범주 속의 나는 내향형(I)이면서 사람의 마음이나 관계를 고려해서 판단하는 감정형(F)이다.

 

어린 시절의 나는 수줍음이 많은 아이였다. 공교육을 받은 12년 동안 나의 생활기록부에는 차분하고 얌전하며...라는 말이 수식어로 따라다녔다.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몹시 꺼려서 학교생활 중 발표수업이 가장 싫었다. 그래서인지 엄마가 지향하는 교육의 목표 중 하나는 나를 외향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엄마는 어떻게 해서든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만들어주고 싶어 했다. 정기적인 모임이 있는 걸스카우트 활동과 웅변 학원에 다닌 것은, 엄마가 미리 그려 둔 계획이었다. 웅변대회에 나가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는 경험을 쌓으면 내 성격이 바뀔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 같았다. 80년대 웅변 원고는 북한을 타도해야 한다거나 꺼진 불도 다시 보자같은 내용이 주를 이루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기 짝이 없는 그 원고를 외우고 또 외웠다. 그리고 대회도 참가했다. 상도 받았다. 해야 하는 일이 있을 때 등 떠밀려 나가면 어떻게든 해내기는 하지만 일회성에 가까운 일이 내 성격을 바꾸게 하지는 못했다.

 

대학에서 영어 교사 자격증을 취득한 후 체계적인 교수법을 더 배우고 싶어 교육대학원에서 TESOL 수업을 들었다. 수업은 원어민 교수에 의해 영어로 진행되었다. 학기 말이 다가오자, 교수는 평가 방식에 관해 설명했다. 수업할 교안을 작성한 뒤, 이를 바탕으로 교수와 학생들 앞에서 영어로 수업하는 것이다. 교생실습의 경험은 있었지만,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수업하는 것과는 달리 원어민 교수 앞에서 수업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무게감으로 다가왔다.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일탈을 저질렀다. 발표 수업이 있던 날, 한참을 고민하다가 수업에 가지 않기로 했다. 대신 친구를 만나 밥을 먹고 차를 마셨다. 평소 같았으면 즐거웠을 친구와의 만남이 전혀 즐겁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만 무거워지고 그동안 열심히 들었던 수업이 물거품이 되는 건 아닌지 걱정만 늘어갔다. 결국 나는 교수의 호출을 받았다. 다음날 교수 연구실에 찾아갔을 때, 교수님은 결석한 이유를 묻지도 나무라지도 않고 발표하지 못한 몇몇 학생들과 다시 할 기회를 주겠다며 이번에는 어김없이 해야 한다는 말로 이야기를 끝맺었다.

다시 주어진 발표 시간. 내 순서는 두 번째였다. 예상했던 대로 염소 울음소리 같은 떨리는 목소리로 발표를 시작했다. 그러나 수업이 진행될수록 목소리는 안정되었고 사람들의 얼굴도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신기하게도 발표를 기다리며 앉아 있을 때보다 긴장이 덜 되었다. 결코 지날 것 같지 않았던 20분의 시간은, 그 시간의 길이를 느끼지 못할 만큼 빨리 흘렀고 발표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느껴야 할 성취감은 느낄 겨를도 없이 그저 끝났다는 안도만이 남았다. 이번에도 해야 할 일을 어떻게든 해내긴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몇 번의 경험을 쌓아도 익숙해지지 않는 일은 있다.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성향 중 장점을 발견하면 내 유전자가 영향을 미쳤을 거라 확신하는 편이지만 성격에 관해서는 그럴 수가 없다. 처음 만나는 사람 앞에서 유독 낯을 가리고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리는 쌍둥이들. 그러나 내 부모님을 보면서 성격 유전자는 어느 방향으로 흐르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부모님은 지인이나 동창 모임에서 늘 회장이라는 타이틀을 가졌다. 게다가 엄마는 처음 만난 사람과도 마치 10년은 알고 지낸 사람처럼 대화하는 중년의 친화력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유전자는 나도 아이들도 갖지 못했다. 우리 아이들은 학교에서 하는 활동 중, 발표수업과 가창 시험이 가장 하기 힘든 일이라고 하니 말이다.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딸은 새로운 학급의 분위기는 어떨지, 마음에 맞는 친구들은 사귈 수 있을지 고민한다. 나는 친구에게 먼저 말을 건네보는 건 어떻겠냐며, 나 역시 쉽지 않았던 일을 아이에게 조심스럽게 권해 본다. 아이의 유치원 시절, 하원 때 얼굴을 익혀 일 년에 한두 번씩 만나며 인연을 이어가는 엄마가 있다. 엄마들끼리 친분은 있지만 아이들은 서로 성향이 달라 가까워지지 못했다. 그런데 그 친구와 같은 고등학교에 배정되었고 올해는 같은 반에 심지어 짝이 되었다. 전교 회장 선거에 나갈 만큼 리더십도 있고 사교성이 좋은 그 아이는 새 반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우리 반 모두와 다 친해질 거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오히려 그 아이의 엄마는, 지나치게 외향적인 아이의 성격이 다른 사람의 영역을 침범하게 되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었다. 나는 딸에게 새 반의 친구들에게 먼저 말을 걸어 보라고 하고, 외향적인 친구의 엄마는 친구들에게 너무 과하게 다가가지 말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어느 날 그 친구가 딸에게 진지하게 물어봤다고 한다.

내가 너무 적극적으로 다가가서 말 걸면 부담스럽니?”

아니, 먼저 다가와서 말 걸어주면 고맙지.”

이런 이야기를 전하며 딸은 엄마, 내성적인 아이들은 외향적인 친구들에 의해 간택받는 것 같아요.” 내향인이든 외향인이든 세상 속에 섞여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각자의 성향 안에서 어느 정도의 노력이 필요한가 보다.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학교와 사회는 여전히 리더십 있는 외향인에게 더 주목하고 그들처럼 되기를 요구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자라는 동안 내 성격을 고쳐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우리 아이가 내성적이어서요...”라고 말끝을 흐리거나, “ㅇㅇ는 성격을 적극적으로 바꿔 보는 게 어떨까?”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성격이 마치 고장 난 물건처럼 고쳐 써야 할 대상이라고 느껴지곤 했다.

학창 시절,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해 내가 가진 장점들을 보여주지 못하고 한걸음 물러서 있는 나를 보며 엄마는 늘 애를 태웠다. 그럴 때면 굳이 나서서 내가 누군지 증명해 보이지 않아도 사람들이 나의 숨은 능력을 알아봐 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곤 했다. 유독 내성적인 성격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오래 들어주고 깊이 생각하며 신중하게 결정하는 장점들을 바라보지 못한다.

 

속도가 다를 뿐이다. 새로운 자극에 노출되었을 때, 즉각적으로 반응하기보다 행동에 이르기까지 오래도록 관찰하고 고민하는 편이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시간이 쌓이는 만큼 관계의 밀도는 깊어진다고 믿는다. 물론 지금 만나는 마음에 맞는 친구들도 처음엔 어색한 관계에서부터 시작했겠지만, 그들을 만나면 나는 무장해제가 된다. 내재 되어 있는 다양한 내 모습들을 만날 수 있다. 숨겨둔 개그 본능도 꺼내 보이고 애교도 아낌없이 드러낸다. 나에게 몸을 기울이고 내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어 주는 그들 앞에서 나는 수다쟁이가 되기도 한다.

 

며칠 전 아들의 학교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학교 운영위원회 일을 맡아 달라는 부탁의 전화였다. 관심도 없고 해본 적도 없는 일이다. 잘해 낼 자신이 없는 일에 섣부른 시작을 하지 않는 편이라 정중히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언뜻 듣기로는 매달 정기 모임을 해야 하고 학교 안건에 관해 회의도 해야 한다는데 낯선 곳에서, 원하지 않는 일을, 게다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과 해야 한다는 사실은 상상만으로도 버거웠다. 그러나 거듭된 부탁에 거절의 힘을 잃은 나는 하실 분이 정 없으면 해보겠지만 전 앞에 나서서 하는 일은 어려울 것 같으니, 뒤에서 도움이 되는 일을 해보겠습니다.”

밀어내거나 피하지는 않는다. 다만 앞에 나서지 않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어 나간다. 오늘도 나는 나만의 속도로 나지막이 세상에 스며들기 위한 충전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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