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에서 길을 만나다
서동관
"수필 동아리 '수수밭'에 관심 있는 분들은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나는 수수밭 회장을 따라가기 위해 안골설렁탕의 문고리를 잡았다. 그때는 몰랐다. 문을 여는 그 순간이 잠들어 있던 불씨를 다시 지피기 직전임을.
글을 배우기 위해 대학교에 들어온 지금이지만 돌이켜 보면, 글은 이미 오래전부터 물 빠진 단풍잎 책갈피처럼 내 삶에 군데군데 살포시 끼워져 있었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홀로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조금이라도 일찍 돕고자 고향 서산을 떠나 타 지역에 있는 실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입시와 거리가 멀었기에 방과 후 라디오는 친구처럼 항상 곁에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여자가 내 마음속으로 스며들어왔다. 긴 머리의 그녀는 '그 이유가 내겐 아픔이었네'를 부르며 이제 막 떠오르던 신인가수 이지연이었다. 설익은 감정이 가슴에 차고 넘치자 사춘기 소년은 책상에 앉아 한 번도 써 본 적 없는 팬레터를 써 내려갔다. 한 장도 채우지 못한 몹시도 서투른 편지였다. 팬레터를 보냈던 일을 잊고 있을 때쯤, 하교 후에 하숙집으로 돌아오니 믿을 수 없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후리지아 빛깔의 노란색 편지지에 깨알같이 작고 귀여운 글씨가 담긴 답장이, 가수의 사인과 함께 오롯이 내 손에 도착한 것이었다. 같은 방을 쓰던 룸메이트도 같이 좋아해줬다. 비록 문학의 한 꼭지가 되지 못하고 짧게 반짝이다 사그라든 불티에 지나지 않았지만, 글이 처음으로 내게 안겨 준 희열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첫 여자 친구를 만날 때도 그랬다. 해가 떠 있을 때 보는 것만으로는 아쉬워 달이 넘어갈 때까지 나의 감정을 바닥에서부터 긁어모아 차곡차곡 편지에 담았다. 그렇게 밤새 쓴 편지는 한 장, 두 장, 세 장을 넘어 어느덧 열 장을 채웠다. 편지지에 그녀의 얼굴을 담을 때마다 내 마음은 수줍은 연분홍빛으로 물들었다. 글은 나의 감정의 결을 잔잔하게 펼쳐주었다.
그 후 10여 년간 글에 닿지 못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며 취업을 준비했고, 직장에 들어가서는 회사 생활에 적응하고 야근을 반복하는 삶속에서 글은 자연스레 멀어져 갔다.
글을 다시 쓸 수 있었던 것은 2007년, 자전거로 전국 일주를 다녀오면서부터였다. 당시만 해도 자전거 여행자가 많지 않아 자전거 여행에 관련한 정보가 턱없이 부족해 준비하는 과정이 녹록지 않았다. 그래서 자전거 여행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며 29일간의 생생한 후기를 인터넷 사이트와 네이버 카페에 올렸다. 글이 주는 달콤함은 상상 이상으로 진했다. 여러 방송사에서 섭외가 들어왔고, 2007년 개정 고등학교 국어(상) 교과서 1단원 '함께하는 언어활동'에 내 사진과 글이 실리게 되었다. 글은 내 삶의 궤적을 바꾸어 놓았고, 나를 바로 세워주는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나는 블로그를 통해 생활 글을 꾸준히 써나갔고, 생생한 자전거 여행 후기부터 귀농 후 겪은 바스락거리는 이야기까지 한 겹 한 겹 차곡차곡 쌓여 갔다.
나에겐 8년 동안 사귄 띠동갑 연인이 있었다. 그동안 감춰져 있던 갈등이 상견례를 앞두고 수면 위로 떠올랐고, 끝내 극복하지 못한 채 서로의 손을 놓게 되었다. 그때쯤 어머니께서 다리가 불편해지셔서 가까이서 모시기 위해 부천에서의 오랜 생활을 정리하고 서산으로 내려왔다.
고향이지만 예전과 많이 달라진 서산에서의 낯선 삶은 외로움 그 자체였다. 집에서도 혼자였고, 일을 할 때도 혼자였다. 담배는 끊은 지 오래고 술을 끊은 지도 5년이 넘었다. 연애, 주식, 골프, 유흥 그 무엇도 하지 않은 채 오로지 집과 일터만 오가는 건조한 삶이었다. 이런 생활이 반복되자 남는 시간을 무의미하게 소비해야 했고, 삶은 극도로 메마르고 척박해졌다. 그래서 예전부터 마음이 닿았던 글쓰기를 배워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서울디지털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2학기 신입생 입학신청을 받고 있어서 바로 지원했다. 비가 그치자 꽃이 핀 것처럼, 적절한 시기에 얻은 간절한 만남이었다.
얼마 후 서울디지털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개강 모임 한다는 문자가 왔다. 내 글공부의 문을 여는 첫 오프라인 모임이었기에 모든 일을 미루고 4시간을 운전해 참석했다.
개강의 설렘으로 설친 잠과 운전의 피로감으로 이미 지쳐있었지만 마음을 다잡고 모임 장소인 안골설렁탕에 들어섰다. 그곳은 이미 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다. 교수님의 격려사가 끝나고 동아리 소개가 이어졌다. 시, 소설, 동화, 시나리오, 수필 동아리까지 모든 소개가 끝났을 때 내 마음이 닿은 곳은 수필 동아리 '수수밭'이었다. 다른 동아리도 마음에 들었지만 우선은 내 삶의 궤적과 진솔한 이야기를 온전히 글로 담아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공식 행사가 끝나고 각 동아리는 동아리 회장을 따라 인근 카페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우리 일행도 카페로 향했다. 그곳에서 동아리 운영과 글쓰기에 관해 궁금한 점을 묻고 답하는 대화가 이어졌다. 많은 궁금증을 풀고 카페를 나설 쯤에는,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장대비가 세차게 내려붓고 있었다.
어렸을 때 썼던 편지가 만들어낸 불티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줄 알았다. 하지만 안골설렁탕에서 '수수밭'을 만나고 쓰게 된 첫 수필이 불씨가 되어 나타났다. 아궁이의 불이 꺼진 듯 보여도 뒤적거리면 불티가 흩날리는 것처럼, 내 가슴속에 오랫동안 품고 온 불씨 하나가 꺼지지 않은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잠들었던 나의 '글'에서 'ㅡ'를 바로 세우자, 마침내 걸어갈 나의 '길'을 만나게 되었다. 오늘도 단풍잎 하나를 나의 시간 사이에 살포시 끼워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