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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장을 덮고 밥을 짓다    
글쓴이 : 김현숙    26-07-07 20:18    조회 : 13
                                           책장을 덮고 밥을 짓다                                                김시온

  1992년 가을은 유난히 서늘했다.
그해의 주일은 늘 교회의 문을 가장 먼저 열고,가장 늦게 닫는 하루였다. 유치부교사로 아이들과 찬양을 부르고 예배 반주를 마친 뒤에도 나는 좀처럼 교회를 떠나지 못했다. 청년부실 문을 가장 먼저 열고 들어가 먼지 쌓인 책상과 의자를 닦고, 피아노 건반을 하나하나 훔치는 일이 어느새 습관이 되었다. 그 시간 만큼은 세상보다 내 마음을 먼저 정돈하는 예배였다.
마지막 건반을 닦고 돌아설 무렵, 문밖에서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문을 열자 커다란 가방을 멘 한 청년이 서 있었다. 복학 후 처음 교회를 찾았다는 그는 낯선 사람 답지 않게 맑은 눈으로 웃고 있었다. 그날의 짧은 인사가 내 청춘 한 권의 첫 장이 될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우리는 같은 조가 되었고, 청년부 책자를 만드는 일을 함께 맡았다. 그는 말을 앞세우기보다 삶으로 믿음을 보여 주는 사람이었다. 기도회가 끝난 늦은 밤이면 집 앞까지 함께 걸었다. 가로등 아래를 나란히 걸으며 우리는 믿음과 미래를 이야기했고, 같은 길을 걷던 발걸음은 
어느새 같은 마음을 향하고 있었다.

 우리가 만난 지 백일 이 되던 날, 그는 작은 상자를 건넸다. 어머니가 오래 간직한 금을 녹여 직접 맞춘 반지였다. 우리는 서로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며 영원을 믿었다. 젊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쉽게 믿게 하는 계절이었다.
우리의 데이트는 늘 서점으로 이어졌다.

새 책 냄새가 가득한 서가 사이를 천천히 걸으며 서로에게 어울리는 책을 골랐다. 그는 선물한 책 첫 장에 날짜를 적고, 내 이름과 자신의 이름을 나란히 써 넣었다. 그리고 늘 같은 문장을 남겼다.

‘이 세상 끝날 때까지 함께하겠습니다.’

 그 문장을 읽을 때마다 사랑은 책처럼 오래 남을 것이라 믿었다. 활자는 지워지지 않고, 약속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계절은 몇 번이나 바뀌었고 ,약속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푸르던 잎이 붉게 물들고 끝내 바람을 따라 떠나가듯, 영원을 믿었던 사랑도 시간을 이기지 못했다. 헤어짐은 한순간이었지만, 받아들이는 데는 긴 계절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변한 마음이 원망스러웠다. 사랑은 영원해야 한다고 믿었던 만큼 상실은 깊었다.
하지만 시간은 슬픔보다 먼저 깨달음을 데려왔다.

사랑은 변하지 않는 마음을 붙드는 일이 아니라, 변해 가는 시간을 받아들이는 일이라는 것을. 한 사람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통해 나 또한 성장하는 일이라는 것을.
첫사랑은 끝났지만, 그 사랑은 내 안에서 한 권의 책이 되었다. 기쁨과 상실, 기다림과 성장이 밑줄처럼 남아 있는 책. 나는 그 책을 가슴 한편에 꽂아 둔 채 또 다른 계절 속으로 걸어갔다.

  그곳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그는 젊은 날 꿈꾸던 사람과는 달랐다. 체격도, 성격도, 가치관도 달랐다. 같은 풍경을 바라보면서도 다른 생각을 했고, 같은 식탁에 앉아도 서로 다른 음식을 찾았다. 닮은 점보다 다른 점이 더 많은 사람이었다.
그 다름은 때로 부딪침이 되었지만, 세월은 우리에게 한 가지를 가르쳐 주었다.
사랑은 같은 사람끼리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두 아들을 키우며 스물여섯 해를 함께 건너왔다. 특별한 사건보다 평범한 하루가 더 많았다. 아이들의 도시락을 싸고, 늦은 밤 귀가를 기다리고, 서로의 피곤을 말없이 알아채는 시간들이 우리 부부의 역사가 되었다.
돌이켜 보면 결혼은 사랑의 종착지가 아니었다. 사랑을 매일 새로 배우는 교실이었다.
그때 나는 비로소 오래전 서점에서 읽던 사랑을 덮고, 삶이라는 책의 다음 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 먼저 넘긴 것은 책장이 아니라 우리의 계절이었다.

   삶은 생각보다 소박한 곳에서 사랑을 완성하고 있었다.
남편은 고기를 좋아하고, 나는 생선을 좋아한다. 그는 얼큰한 찌개를 찾고, 나는 담백한 국을 끓인다. 젊은 날의 나라면 왜 나에게 맞춰 주지 않느냐며 서운해 했을 것이다. 그러나 스물여섯 해를 함께 살며 알게 되었다. 사랑은 같은 입맛을 갖는 일이 아니라, 서로의 입맛을 위해 장바구니를 바꾸는 일이라는 것을.

  오늘은 그가 좋아하는 고기를 사고, 내일은 내가 좋아하는 생선을 산다. 한 사람이 조금 물러서면 다른 사람이 조금 다가온다. 그렇게 비워 준 자리마다 가족이라는 이름이 차곡차곡 쌓였다.

생각해 보면 우리를 지켜 준 것은 거창한 약속이 아니었다.
늦잠 자는 남편 몫의 국을 약불 로 올려두는 일.
비 오는 날 우산을 들고 마중 나가는 일.
말없이 과일을 깎아 식탁 한가운데 밀어 놓는 일.
별것 아닌 하루를 무사히 건너도록 서로의 안부를 살피는 일이었다.

어느 휴일 아침, 남편이 먼저 잠에서 깨어 말했다.
“오늘 당신 좋아하는 서점에 갈까?”

 뜻밖의 말에 오래전 책 등 사이를 거닐던 청춘이 문득 떠올랐다. 영원을 믿으며 책장을 넘기던 두 사람이 있었다. 그 기억은 이제 아픔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만든 한 계절로 남아 있었다.
그가 웃으며 덧붙였다.
“대신 아침밥은 꼭 먹고 가자. 당신이 해 주는 집 밥이 제일 맛있어.”
나는 대답 대신 쌀통을 열었다.
쌀을 씻는 동안 창밖으로 아침 햇살이 번져 왔다. 물속에서 부딪히는 쌀이 맑은 소리를 냈다. 냄비에 불을 올리자 하얀 김이 천천히 부엌을 채웠다.

 문득 오래전 책 첫 장에 적혀 있던 문장이 떠올랐다.
그때는 사랑이 문장으로 남는 줄 알았다.
지금은 안다.
사랑은 문장이 아니라 생활이라는 것을.

  책은 한 사람의 마음을 키웠고, 밥은 한 가족의 삶을 지켜 주었다. 서점에서 사랑을 읽던 나는, 부엌에서 사랑을 배웠다. 활자로 쓰인 영원은 세월을 견디지 못했지만, 하루 세 번 차려 낸 밥상은 말없이 우리를 가족으로 묶어 주었다.
돌아보면 사랑은 변한 것이 아니었다.
읽는 사랑에서 살아내는 사랑으로, 꽃처럼 피어나는 사랑에서 밥처럼 익어 가는 사랑으로 자라고 있었을 뿐이다.

  오늘도 나는 오래된 책장을 조용히 덮는다.
곧장 부엌으로 간다.
쌀을 씻고 불을 올리고, 식탁을 차린다.
갓 지은 밥에서 피어오르는 따뜻한 김 사이로, 말보다 오래가는 사랑이 오늘도 천천히 익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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