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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다 남은 부지깽이일지라도    
글쓴이 : 박희래    26-03-21 19:51    조회 : 306

타다 남은 부지깽이일지라도

 

박희래

 

 세례받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특권을 누렸으나 나의 믿음생활은 겉돌았다. 영혼 없는 육신은 목적지 없는 조각배처럼 생의 수면 위를 부유할 뿐이었다.


 장인어른과 장모님의 평생소원이라며 아내의 권유로 CBS 100주년 기념으로 Pilgrims' Vision Tour 2006”250명이 10.30-11.11(1213) 튀르키예, 이집트, 이스라엘, 그리스 등 4개국 성지 순례길에 올랐다. 튀르키예에서 그리스로 이어지는 척박한 땅들이 내 메마른 영혼의 지도 위로 들어왔다.

여정의 시작은 보스포루스 해협의 여객선 위였다. 두 나라의 국경을 가르는 물살 위 선상에서 예배가 시작되었고, 이어진 그랜드 바자르 시장의 활기는 낯선 이방인을 '형제의 나라'라며 뜨겁게 껴안았다. 하지만 내 마음속은 축제보다 치열한 전쟁터였다. 20년간 지독하게 탐닉해 온 끽연의 습성이 가판대 앞에서 멈춰 섰다. 담배 열 갑을 사려는 욕망과 식도가 삭기 전에 이제는 과감히 단절해야 한다는 의지가 팽팽하게 맞붙었다. 그 순간, 나는 짧은 기도를 올렸다. "주님, 연기 속에 갇힌 저를 꺼내주소서. 더 이상 술 생각나지 않게 해주세요.“

금연과 금주는 즉각적인 금단 현상을 몰고 왔다. 미국 여행 중 케네디 공항에서 이륙하기 전에 연거푸 몇 개비를 달콤하게 탐닉하던 그 연기가 환영처럼 떠올라 정서적 불안이 엄습했다. 그러나 고통의 시간만큼 몸은 정직하게 반응했다. 얼굴 전체를 뒤덮고 있던 검은 기미가 걷히며 맑은 살결이 돋아났고, 거친 기침도 잦아들었다. 술기운에 뒤틀렸던 속이 평온을 찾자 내장 기관들은 제 자리를 찾아 숨쉬기 시작했다. 나쁜 습관은 서서히 줄이는 것이 아니라 단칼에 베어내야 하는 '단절'의 영역임을 몸소 체험한 순간이었다.

성지순례의 정점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 터에서 만난 '부재不在'의 풍경이었다. 한때 화려하고 번창했을 교회들은 이제 흔적만 남은 잔 터가 되어 있었다. 사데와 라오디게아의 퇴락한 기둥 사이로 성령의 준엄한 책망이 바람 소리처럼 들리는 듯했다. 에베소와 빌라델비아를 거치며 나의 비대했던 자아는 서서히 녹아내렸고, 닫혔던 영안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성지순례 길에서 타다 남은 부지깽이인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이다. 영원한 것은 오직 보이지 않는 하나님임을, 말씀이 폐허 위로 육화肉化되어 다가왔다

귀국 후 5개월간 나는 대학 노트 10권에 그 은혜의 기록을 쏟아냈다. 기록은 삶의 변화로 이어졌다. 대형면허를 취득해 사랑부에서 행동 발달 장애인들을 위한 버스 운전 봉사를 시작했다. 성경은 이제 활자가 아닌 지도와 역사 속의 실재로 읽히기 시작했다. 성지순례란 결국 물리적 이동을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 위에 나의 남은 생을 포개어보는 일이었다.

인생은 부모라는 조각가의 손에 의해 최고의 걸작으로 빚어져 인생길 동반자 부부라는 이름으로 사랑을 주고받다 결국 다시 홀로 신 앞에 서는 여정이다. 이 세상의 끝 날은 영원한 본향으로 떠나는 첫날이기에 죽음은 슬픔이 아니라 기쁜 회귀이다.

나는 오늘도 소아시아의 길 위에서 받은 그 '레마'의 말씀을 붙든다. 84세의 노구로 성경에서 모세가 십계명을 받았다고 전해지는 이집트의 시나이반도의 시내산 정상(2,291m)을 당시 두 번째 오르던 형제의 뒷모습을 기억하며, 나 또한 주님이 부르시는 날 기꺼이 '아멘'으로 화답할 준비를 한다.

   

 영존하신 분 외에 모든 것은 사라진다. 그러므로 오늘을 복되게 살아내는 것, 받은 사랑을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는 것만이 순례자가 걸어야 할 유일한 길이다. 마라나타, 그 간절한 기다림이 나의 남은 생을 환하게 비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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