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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씩 꺼내 먹는 피로 회복템    
글쓴이 : 최경묵    26-02-11 00:36    조회 : 130
   제출(수필)가끔씩_꺼내_먹는_피로_회복템02.hwp (16.0K) [0] DATE : 2026-02-11 00:36:15
가끔씩 꺼내 먹는 피로 회복템

최경묵

  10월이 시작되던 어느 이른 아침이었다. 그날은 안개가 짙게 깔려 있었다. 나는 어릴 때 이런 날씨를, 아니 아침을 좋아했다. 안개가 걷히고 나면 맑은 날씨가 드러났고 내 기분도 덩달아 밝아지곤 했다.
  엄마는 아버지를 뒤따라 곧 밭에 나가야 할 차림으로, 평소에 등교할 때처럼 늦지 않도록 서두르라며 집을 떠나는 내게 손을 흔들어 주셨다. 학교까지 걸어서 한 시간은 걸렸는데, 그날은 학교 앞에서 일행을 만나 함께 가야 할 곳이 있었다. 두어 달 전부터 계획했던 일이었고, 학교 담임교사에게도 미리 알렸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모두 나보다 먼저 와 있었다. 내 또래 여학생 네 명과 보호자인 성인 두 명이 함께 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들은 상기된 내 얼굴을 보며, 밝은 회색 승합차에 먼저 올라탄 채 나를 맞아주었다. 평소와 다르게 프릴이 달린 원피스를 입은 아이도 있었고, 어쨌든, 모두 옷차림에 한껏 신경 쓴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블라우스에 플리츠스커트를 입고 조끼를 걸친 수수한 차림이었다. 
  요즘은 승용차로 한 시간 반이면 닿는 거리지만, 그때는 세 시간을 넘게 달려야 했다. 벌써 사십여 년 전의 일이다. 그날의 짙은 시월의 안개 속을 달려 도착한 곳은 장충동의 신라호텔이었다. 그곳의 1층 홀에 준비된 초중고생 대상의 피아노 경연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안내원을 따라 들어간 행사장 홀은 넓고 탁 트여 있었다. 참석자들과 그 가족들로 자리는 꽤 차 있었는데도 어쩐지 휑했다. 천장은 높고 실내는 넓은데,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좁은 방 안에서 말할 때처럼 가깝게 들리는 것이 신기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소리의 잔향을 줄이기 위해 곳곳에 흡음재를 배치해서 그랬던 것 같았다. 공간적으로는 썰렁했지만, 음향적으로는 아늑한 느낌이었다. 그런 의외의 조화가 내게는 신기했다. 옅은 팥죽색 카펫을 깔아놓은 무대는 넓었다. 무대 위에는 피아노 한 대가 놓여 있었고, 세 개의 계단 아래에는 학생들과 보호자들이 앉아 연주를 지켜볼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진행자의 짧은 안내 멘트에 이어 연주 대회가 시작되었다. 홀의 한쪽 벽에는 병풍 파티션을 세워 홀과 대기 장소를 구분해 놓았다. 정해진 순으로 학생들을 부르면 열 명씩 한 줄로 된 의자에 가 앉아 차례를 기다렸다. 학생들이 저마다 준비해 온 곡을 연주하고 있었지만, 나의 귀에는 그 소리가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나의 심장 소리만 들렸고, 점점 빨라졌다. 단정한 차림의 안내원이 분주히 오가는 것이 보이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내 차례가 가까워진 것이다. 파티션 뒤의 대기용 의자에 앉았을 때는 나의 심장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거대한 바윗덩이에 짓눌린 듯 숨쉬기가 곤란했다. 맨 앞의 대기자가 무대 위로 올라갈 때마다 하나씩 빈자리가 생겼다. 우리는 안내원의 지시에 따라 의자를 하나씩 옮겨 앉았다. 
  내 차례가 되어 앉은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는, 어쩐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대 위로 올라가 피아노 앞에 앉았다. 의자를 조금 당기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여전히 내 심장은 뭔가에 짓눌린 듯했다. 피아노 건반 위에 손을 얹었다. 그동안 연습했던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지난 두 달 가까이 연습했을 때처럼 내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 위에서 움직였다. 그런대로 연주를 할 만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경험한 무대 연주였고, 나의 심장은 여전히 멎어 있다고 믿을 정도였다. 적어도 틀리는 부분 없이 연주를 마쳤다. 연주하다가 손가락의 움직임이 조금이라도 어긋나 연주가 틀렸다면 부담감이 커서 심리적으로 몹시 불안정해졌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 되어도 매끄럽게 잘 넘길 수 있으려면 연주 경험이 많아야 할 것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내 심장 위에 바윗덩이 같은 것을 수십 개는 더 얹어봐야 가능할 일이지 않을까. 다행히 연주를 마칠 때까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경연대회였으니 어떠한 결과가 나오기는 했다. 최고상인 대상 다음가는 금상을 받았다.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던 나의 작은 에피소드 하나를 기억 속에서 꺼내어 나열한 것이 얼마나 정확할까 하는 의문도 든다. 하지만 그것이 뭐 그리 중요할까.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불필요한 디테일은 사라지고 핵심적인 정보만 남는다고 뇌과학자나 심리학자들은 그런다. 시간이라는 개념이 그저 착각에 불과하다고도 하지만, 이럴 때만큼은 그 ‘시간’을 믿지 않을 수가 없다. 세상 경험이 많지 않았던 그 시절의 내가, 극도의 긴장감을 스스로 이겨냈다는 기억 하나가 내게 또렷하게 남아 있다. 가끔은 마음이 힘들어져 스스로 힘을 내야 할 때, 그 기억은 내게 피로 회복 템 같은 부스터가 되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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