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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명 : 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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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는게 사는게 아니야    
글쓴이 : 정진희    12-06-27 16:07    조회 : 4,302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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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희
 
가로막힌 유리창 너머로 입체형 마스크에 흰 장갑을 낀 남자가 보자기를 젖히자 우윳빛 뼈 조각들이 드러난다. 함부로 던져져 부서진 비스켓 같다. 넓적한 머리뼈는 오른편으로 골라놓고 남은 것을 둥그런 단지에 담는다. 절반쯤 담겼을 때 절구 방망이로 단지 안의 뼈를 부수고 나머지를 쓸어 담으니 단지가 꽉 찬다. 그 위에 아까 골라 놓았던 뼈를 얹고 이중덮개로 마감을 한다. 다시 흰 보자기로 단지를 힘껏 싸맨 후 유리창 옆 작은 구멍 앞에 놓는다. 유족들 앞으로 미끄러지듯 실려 나온 보따리 하나가 65년을 살다 간 사람의 전부였다.
 
여보게, 김치 있어?” 수화기 저 편에서 늘 다짜고짜 용건부터 말하는 그녀는 남편의 큰 누나이고, 내게는 시어머니나 친어머니 같은 존재였다. 서로의 남편에 대한 푸념으로 시작한 술자리가 배꼽 빠지는 웃음 자리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 붙들고 실컷 울기도 했던 날들. 그럴 때면 그래, 내가 엄마다, 엄마야.”라며 등 두드려 주던 그녀가 죽었다.
엊저녁에 수퍼 갔더니 배추가 싸서 다섯 단이나 샀어. 지금 담는데 시간 날 때 가지러 와.” 라는 전화를 받은 건 그제 아침 9시경. 그리고 그녀가 죽었다는 전화를 받은 건 두 시간 후였다. 그것은 서울 한복판에 외계인이 나타났다는 것보다, 평양 하늘에서 금덩어리가 쏟아져 굶는 아이가 하나도 없게 됐다는 소리보다 더 믿을 수 없었다.
팽팽한 삶에서 죽음으로 가는데 걸린 두 시간 동안 그녀는 김치를 다 담고 소쿠리를 씻다가 힘들다며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우황청심환을 달라고 해서 마시더니 속이 시원하다며 옆으로 슬그머니 누웠다. 묻는 말에 대답 없는 것이 이상해서 그녀의 남편이 다가갔을 땐 이미 숨을 쉬지 않았다.
갑작스런 죽음에 명찰만 붙은 빈소엔 그녀의 자식들이 넋 나간 듯 앉아있었다. 그 뻥 뚫린 눈빛과 마주치는 순간, 잊은 줄 알았던 기억의 뒤편에서 걸어 나오는 내 모습을 보았다. 20년 전 엄마의 죽음 앞에서 나도 저런 눈빛이었으리라. 세상으로부터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긴 자가 뿜어내는 신과 삶과 인간에 대한 원망과 그 원망조차 풀 길 없이 바닥으로 꺼져가던 허탈감. 그 후로도 오랫동안 어깨에 쌓이는 먼지조차 무거워 부숴 질 것만 같았던 세월이 있었다. 죽음도 삶의 연장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뒤 늦게 빈소가 차려지고 음식이 준비되자 모여든 친척들이 술잔을 들기 시작했다. 그녀의 자식들은 초죽음이 되어 있는데 눈물 끝이 짧은 문상객들은 그녀를 둘러 싼 각자의 이야기로 목청을 점점 높여 갔다.
내가 갈 차롄데 왜 지 년이 먼저 가고 지랄이야, 참 나. 성질 급한 건 살았을 때나 죽을 때나 똑 같구마.” 팔십 세 된 그녀의 욕쟁이 큰 고모의 말이다. “에휴, 그 시집도 이제 큰일이겠어. 그동안 언니가 큰 일 다 치르고 제사 다 모시고...기둥이었는데 이제 그 제사며 누가 다 하겠어.” 그녀의 셋째 동생의 말이다. “, 그래도 걔는 복 받은 거다. 좋은 부모 만나 그 나이에 대학 나왔지, 평생 돈 걱정 안하고 살았지, 고통 없이 죽었지, 성질 괴팍한 남편 비우 맞추고 산 것 밖에 뭔 고생을 했냐.” 그녀의 작은 고모 말이다. “언니가 너무 빨리 죽은 건 안됐지만 친정에 한 게 뭐 있어? 엄마 아부지한테 사랑도 제일 많이 받고 돈도 제일 많이 받고 근데 시집에만 잘 했지 우리한텐 얼마나 인색했냐구.” 그녀의 넷째 동생의 말이다. “에그, 이번 달에 곗돈 타면 이젠 계 안 붓고 죽을 때까지 쓰면서 산다드니만 그 돈 한 푼 못 써보고 갔네 갔어.” 그녀의 다섯 번째 동생의 말이다. “, 난 무습다. 우째 이럴 수가 있노 그 나이에. 우리가 지금 사는 게 사는 거로? 사는 게 아이다. 니들도 언제 죽을지 모르니 싸우지 말고 행복하게 살그라. 인생 뭐 있나? 죽은 놈만 불쌍한기라.” 그녀의 외삼촌의 말이다.
나는 그녀의 부지런함이 좋았다. 매일 아침 수영을 하고, 손뜨개로 커튼과 침대보를 만들고, 모든 요리사 자격증을 따고, 계속 요리 학원에서 새로운 음식을 배우고, 친목회마다 회장과 총무직을 맡고, 철 따라 여행을 가고, 일 년에 일곱 번의 제사를 지내고, 교회에선 집사이며 시집에선 큰 며느리에 홀 며느리이며, 친정에선 맏이였던 그녀는, 어쩌면 남은 삶을 다 살고 가느라 그리 바빴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에 대한 분별심이 없고 어떤 일도 귀찮게 여기지 않아 인심도 두둑히 쌓았으니 노자도 넉넉할 것이다. 늘 밝고 활달했으니 밝은 빛을 따라 갔으리라. 부디 다음 생에 만나면 엄마와 딸로 만나고픈, 세상에서 두 번째로 엄마라고 불러본, 나의 큰 신우, 그녀가 죽은 것이다.
 
영정 사진을 든 그녀의 사위 뒤로 유골함을 목에 건 아들과 유족들이 뒤따른다. 새벽까지 내린 비가 다시 흩뿌리기 시작한다. 그녀도 기가 막히나보다. 기막힌 내 얼굴 위로도 뜨거운 빗물이 흐른다. 이른 낙엽이 발길에 차이는 사르락거림과 가을비 속에 숨죽인 흐느낌은 그녀가 선택한 레퀴엠인가 보다. 화장터에서 그녀와의 추억이 한 장 더 끼워진다.
 
삼일장 내내 의연함을 잃지 않던 그녀의 남편이 유골함을 거실 티브이 옆에 내려놓더니 그대로 주저앉아 일어 설 줄을 모른다. 흔들리는 등 뒤로 어떤 위로도 소용없는 태산 같은 슬픔이 얹힌다. 첫사랑과 이별은 너무 빨리 와서 슬프고, 깨달음과 후회는 너무 늦게 와서 슬프다던가. 그 슬픔도 살아가는데 때론 힘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그 슬픔만큼의 시간이 지나야하리라.
고추 가루 삼십 근과 쌀 두 가마니가 배달되어 있는 현관을 지나 그녀의 집을 나선다. 언제 그랬냐는 듯 뽀송뽀송한 햇살에 나뭇잎들이 까르르 웃고 있다. 눈이 부시다. 사는 게 사는 거다. 잘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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