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또 새해라는 길 위에서 마음을 가다듬고 옷깃을 여며봅니다.
오늘 수업은 2년여 대장정의 중국문학기행 마지막 시간이었습니다. 그 휘날레의 주인공은 지난 시간에 이어 근대중국의 부조리에 저항하며 혁명을 일으킨 루쉰입니다. 루쉰을 통해 문학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현장 깊숙이 살아 움직여야 함을 다시 일깨웁니다.
제1부- 중국 문학기행 (루쉰- 두번째 시간)
1919년 5.4운동을 거친 이듬해인 1920년 가을학기부터 루쉰은 베이징 대학에서 ‘중국 소설사’ 강의를 시작한다. 그는 고향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 신해혁명 과정에서 직접 체험한 사건을 모티브 삼아 첫 창작집 <<납함(吶喊>>(1923)을 발간하며 <광인일기>. <콩이지>, <약>, <고향>, <아Q정전>, <사희> 등 초기 중요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역사의 격변 속으로
<노라는 집을 나와서 어떻게 되었나>(1923)로 여성운동사의 한 획을 그으며 학교 강사로 있던 루쉰은 북경여자고등학교 여자교장의 배격운동에 배후인물로 거론되었다. 이후 1925년 상하이의 5.30운동으로 전국이 들끓게 되는데 학생들을 구타, 추방, 체포하고는 ‘학풍 정화를 이룩했다’며 강변하는 군부정권 앞에서 학생들은 굴하지 않고 자비로 강의실을 빌려 강좌를 개설, 교원을 초청한다. 루쉰은 이에 가장 열렬한 지지자였다. 그는 교육부에서 해직 당했지만 학생 지지를 멈추지 않고 투쟁하여 결국 1925년 11월 30일 학생들의 승리로 정상화를 찾는다.
이후에도 시국은 날로 악화일로였으며 반외세 청원 시위대를 학살한 3.18참사(1926년)는 루쉰을 역사의 현장 속으로 더욱 깊숙이 끌어들인다. 반외세 청원 시위대에게 발포한 이 참사에 대하여 루쉰은 <꽃 없는 장미 2>에서 이렇게 쓴다.
-중국은 호랑이와 늑대의 먹이가 되어 있는 데도 아무도 나서서 간여하려고 하지 않는다. 나서는 쪽은 소수의 젊은 학생들뿐이다.
-먹으로 쓴 거짓말이 피로 쓴 사실을 감출 수는 없다. 피의 빚은 반드시 같은 것으로 갚아야 한다. 그리고 그 갚음이 늦으면 늦을수록 이자는 늘기 마련이다.
이후, 아모이대학 교수가 된 루쉰은 여기서 걸작 <주검>을 썼고, 소설집 <<방황>>(1926)을 펴냈다. 이듬해 1월 그는 혁명의 진원지 광저우으로 가서 중산대학 교수가 되어 제자 쉬광핑을 조교로 채용한다. 그러나 장지에스(蒋介石)의 상하이 4.12쿠데타(1927)가 발생하고 그 여파로 광저우에서도 대대적인 검거선풍이 벌어진데다 대학 당국의 학생 처벌 등으로 루쉰은 사직하고 상하이로 피신하여 쉬광핑과 결혼(10월)한다.
1928년이 되자 중국문단은 창조사, 태양사 등 프롤레타리아혁명파가 대두하여 루쉰에게 공격의 화살을 퍼부었는데, 그는 대응논리를 찾으면서 스스로 마르크스주의를 연구, 프롤레타리아 혁명문학자로 변신한다. 회상기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1928)를 비롯하여 혁명문학론 번역과 순수문학파 ‘신월사와 격렬한 논쟁(1929)을 전개하기도 했다.
1936년 10월 19일, 그는 폐병으로 민족 독립을 보지 못한 채 타계.
후일담- 아내 주안과 후처 쉬광핑
주안(1878-1947)은 남편이 신변 안전을 위해 여제자 쉬광핑과 베이징을 떠나는 것조차도 허용했고, 그들이 동거, 결혼해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들 사이에 아들을 자신의 자식이라며 반겼다. 반면 쉬광핑(1898-1968)은 루쉰을 무척 존경하고 사랑하면서도 주안에게 항상 죄책감을 느껴 그녀를 찾아가 무척 살갑게 지내며 깊은 정을 지녔다.
2부 합평
이명환/ 설영신/ 정민디/ 김숙/ 이영옥/ 김대원
긴 시간 중국문학기행을 강의해 주신 교수님과 함께 동행해 주신 문우들께 감사드립니다.
겨울철 감기 조심하시고 다음 주에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