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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볕뉘    
글쓴이 : 이나경    25-05-15 22:38    조회 : 1,305
   볕뉘.hwpx (62.8K) [0] DATE : 2025-05-15 22:38:17

볕뉘

 

이나경

 

 

상담 끝날 때까지 기다릴게, 제발 딱 한 번만 차 한 잔 같이 마셔주라.”

 

이 말을 들었던 당시의 나는 참 바빴다. 자살이 아닌 순직을 준비했기 때문이다. 직장 때문에 죽을 각오를 했는데 그냥 죽기엔 내 인생이 너무 아까웠다. 그래서 정신건강의학과 진료와 상담센터 상담 흔적을 남기며 이 아까운 인생에 대한 사회적 타살의 증거를 촘촘히 모으느라 참 바빴다. 이렇게 살다 보니 누군가와 함께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나에겐 사치였다. 근데 그녀는 정말 처절하게 날 붙잡는다. 같이 밥 먹자는 거 몇 번 거절했던 차인데 한 번만 더 거절하면 손절당할 것 같아서 그녀와 함께 순직증거수집 현장에 갔다. 어차피 죽으면 다시 만날 일 없는 사람이지만 그녀가 나를 추억할 때 기왕이면 산뜻한 느낌으로 기억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은 상담센터에서 심리상담이 있었다. 선생님께 오늘의 사정에 대해 말했다. 이야기를 듣던 선생님은 빙그레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참 좋은 삶을 살았나 봐요.”

제가요?”

저분은 인천에 사는 분도 아니고 결혼 준비하느라 바쁜 분이라고 하셨는데 일부러 이곳까지 오셨잖아요. 좋은 사람이니까 일부러 오신 거겠죠?”

 

내가 좋은 사람이었던가, 우울과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먹는 프로작과 인데놀이 나의 슬픔은 물론이고 기쁨까지도 방습제처럼 다 빨아들여 이런 이야기를 들어도 영 기쁘지 않다. 내가 좋은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참 고맙고 좋은 사람임은 분명하다.

 

상담이 끝나거나 진료가 끝나면 나 홀로 영종도 마시안 해변으로 향했다. 평범한 삶을 살 땐 바다에 비쳐 이글거리는 윤슬을 좋아했다. 눈이 부셔 겨우 실눈을 뜬 채로 그 모습을 바라보겠다고 발버둥 쳤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윤슬이 너무 눈부셔서 눈을 질끈 감은 채 심해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하지만 오늘은 바다를 배경 삼아 둘이 나란히 걷고 있다.

 

함께 차를 마시며 그녀에게 실은 내가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그런 내가 걱정되어 이 먼 곳까지 날 따라왔다고 말했다. 아무도 모르게 하지만 내 죽음이 헛되지만 않길 바라고 또 바랐다. 하지만 이렇게 눈치챈 사람이 있다고 하니 내 결심이 무척 부끄러워졌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글거리던 윤슬은 어느덧 잦아들고 하늘과 바다가 보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깊어지고 길어질수록 보랏빛은 칠흑이 되어간다. 저 검은 바다는 얼마나 많은 비애를 감추고 있을까. 하늘 위에 있는 저 빛나는 별들은 나만큼 서러운 존재들의 눈물을 어떻게 비춰주고 있을까. 아직도 난 나의 죽음을 세상이 기억해 주길 바란다. 하지만 죽음의 순간은 좀 더 연장되었다. 날 지켜주기 위해 용기를 낸 그녀 덕분이다. 세 달 후, 난 천국 대신 영국으로 떠났다.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 나라 말도 모른다. 하지만 죽는 것보단 나은 것 같아서 무작정 떠났다.

 

볕뉘. ‘작은 틈을 통해 잠시 비치는 햇볕이란 의미의 순우리말이다. 컴컴한 동굴 속 나를 향해 비치던 한 줌의 볕뉘 덕에 난 이 낯선 곳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영국에서 살던 시간은 어느새 끝났고 난 다시 이 땅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난 프로작과 인데놀을 먹지 않으면 출근할 수 없다. 하지만 이제는 죽고 싶지 않다. 난 아직도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버티고 있지만 평범함 그 옆에서 누군가의 볕뉘가 되고 싶다. 그날의 그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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