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2호선 잠실 운동장 역에서 내려 5번이나 6번 출구로 나오면 잠실 야구장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다. 요 몇 년 새 규모와 시설 면에서 잠실 야구장보다 월등한 곳이 많이 생겼지만 나에게는 아직도 잠실 야구장이 유일한 야구장이다.
잠실 야구장을 처음 찾았을 때가 80년대 후반이었으니 오랜 세월 수도 없이 야구장을 찾은 셈이다. 그러나 난 지금도 야구장을 향한 출구 앞에 서면 여전히 가슴이 설렌다. 요즘이야 온라인으로 표를 예매하고 무인 발매기 앞에서 티켓 교환을 하면 되지만 내가 한창 야구장을 찾던 시절엔 경기 시작 몇 시간 전부터 긴 줄을 서야만 했다. 용돈을 아끼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마련한 돈으로 보러 가는 경기이니 얼마나 소중한 기회였겠는가? 그렇게 어렵사리 운동장까지 갔는데 표가 매진이라도 되면 말 그대도 눈앞이 캄캄해지고 다리에 힘이 쫙 풀렸다. 그렇게 티켓팅에 성공한 사람들은 마치 통과 의례라도 되는 듯 야구장 입구의 패스트 푸드 매장으로 달려갔는데 그곳에서 치킨, 햄버거, 음료 등을 사 들고 응원용 막대풍선을 챙겼다. 그리고 비탈길을 한참 올라가면 마침내 경기장 게이트가 눈앞에 등장한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처럼 그 게이트를 빠져나오면 푸른 잔디와 거칠 것 없이 넓은 하늘이 펼쳐지는 환상의 세계가 나타났다.
그런데 내 인생의 절반 이상을 함께 했던 잠실 야구장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고 한다. 1982년에 완공된 야구장이니 벌써 40여 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시설은 열악해진데 반해 관객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문제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고 한다. 기후 변화로 폭우, 폭염, 미세 먼지에 심지어 4월에 내린 폭설까지 경기에 영향을 미치게 되니 최첨단 시설의 돔구장이 필요하단다. 야구장 뿐 아니라 호텔, 전시 컨벤션 센터 등도 함께 들어선다는 청사진도 발표되었다. 그런데 잠실 야구장을 홈으로 사용하는 팀의 예전 팬도 아닌 내가 여기에 무슨 토를 달겠는가? 하지만 나는 야구장이 없어진다는 것이 못내 서운하기만 하다.
스포츠 팬의 대부분은 10대 초중반의 경험을 통해 스포츠의 세계로 입문한다고 한다. 잠실 야구장이 개장하던 1982년이 내가 10대 중반이었을 때였다. 대부분의 여학생들이 만화 캔디나 조용필 오빠 혹은 마이클 잭슨에게 열광했던 반면 나는 야구에 꽂혔다. 그렇게 된 것은 다 아버지 덕분이다.
아버지는 일요일 한 낮 TV로 중계되는 야구를 유일한 오락 거리로 삼으셨다. 채널 우선권은 아버지한테 있었고 야구 중계가 끝나야 TV를 우리가 차지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놈의 야구 중계가 언제 끝나려나 기다리며 아버지 곁에서 중계를 함께 보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러다 자연스레 야구의 규칙과 선수들을 알게 되었고, 그렇게 나는 야구의 세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프로야구 리그가 시작되기 전에는 고교 야구가 큰 인기를 끌었다. 전국 대회의 고교 야구를 즐기던 관중은 또래의 청소년보다는 중·장년의 남성들이었다. 그들은 더 나은 삶을 위해 상경한 가장들이었고, 팍팍한 타향살이의 설움을 달래기 위해 고향의 고교 야구팀을 목청껏 응원했다. 그런 인기를 등에 업고 프로야구는 출범했다. 군사 정권 시절, 사람들의 정치에 대한 불만을 잠재우려는 의도로 프로야구가 출범했다지만, 이유야 어떻든 좋아하는 야구를 거의 매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기뻤다. 마포 토박이였던 나와 아버지는 자연히 서울팀 MBC 청룡을 열렬히 응원했고, 1990년 LG트윈스로 인수되어 팀명이 바뀐 후에도 팬심은 변함없었다.
대학 2학년의 어느 가을 날 드디어 나에게 잠실 야구장을 직접 가 볼 기회가 생겼다. 이웃 학교의 매년 열리는 큰 행사가 잠실에서 열린다고 했다. 선배, 친구들이 그 행사를 구경 간다기에 나도 그들을 따라나섰다. 그렇게 첫발을 내딛게 된 잠실 야구장의 풍경은 그대로 내 머릿속에 각인이 되었고, 그 후로 기회만 되면 잠실 야구장으로 야구 경기를 보러 다녔다. LG트윈스의 홈구장이 잠실 야구장이었던 것도 큰 이유였다.
그런데 야구장을 그렇게 다녔어도 나에게는 경기의 승패라든가, 선수들의 활약상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그러니까 솔직히 말해 야구 경기 자체보다는 다른 것들을 즐기기 위해 그곳에 갔던 것이다. 경기는 TV로 중계되는 것을 보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나의 야구장의 추억으로 남아있는 것은 이런 것들이다. 야구장 외야 석 뒤로 유난히 붉고 길게 넘어가던 태양의 끝자락, 맥주 통을 짊어지고 땀을 비 오듯 흘리며 관중석을 누비던 맥주 보이의 짠 내 나던 뜀박질,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이들과 목에 핏대를 세우며 불러 댔던 응원가, 야구장에서만 맛볼 수 있었던 오묘한 치킨의 맛, 까만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던 하얀 야구공....
그렇게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라운드에서 뛰던 선수들은 나에게 삼촌과 오빠 뻘이었다가 동년배였다가 이젠 조카와 아들 뻘이 되었다. 나를 야구에 입문 시키신 아버지는 94년 LG트윈스의 우승을 마지막으로 내 곁을 떠나셨고, 내 손을 잡고 야구장을 드나들던 아들 녀석은 장성하여 치어리더 석에서 야구를 즐긴다.
1978년 도쿄 신주구 진구 구장! 서른 살을 앞둔 한 청년이 그곳에서 열린 프로야구 개막전을 외야 잔디석에서 보고 있었다. 넓은 하늘을 바라보던 그는 야쿠르트 스왈로스 (당시 이 팀은 만년 꼴찌였다) 1번 타자 데이브 힐던이 2루타를 날린 순간 불현듯 소설가가 되기로 했고, 그날 밤부터 가게 주방 식탁에 앉아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완성된 소설이 그의 생애 최초의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이다. 그 작품으로 1979년 <군조> 신인 문학상을 수상한 그는 문학계에 화려하게 등단했다. 그리고 만년 꼴찌였던 야쿠르트 스왈로스는 1978년 첫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일화이다.
94년 이후 긴 세월 암흑기를 거쳤던 LG트윈스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는 동안, 무라카미 하루키가 만년 꼴찌 팀을 응원했다는 일화와 한때 LG트윈스의 감독이었던 김성근이라는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가 꼴찌 팀을 구하러 왔다는 뉴스에 호기심이 겹쳐 어느 날부터 인가 나는 한화 이글스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야구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한화 이글스가 몇 년째 리그 최하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익히 알 것이다. 이글스 팬으로 지내는 것은 그만큼 속 쓰린 날이 많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몇 년 째 한화를 놓지 못하고 있다. 굳이 그 이유를 대자면 언더독을 응원하는 스포츠 팬의 마음과 무얼 해도 잘 안되는 것이 마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동질감 같을 것을 들 수 있지만, 좋아하는 데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겠는가?
혹시 아는가? 어느 날, 나이 지긋한 여인이 잠실 야구장 외야석에서 프로야구를 관람하던 중 문득 소설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될지, 그리고 그해 만년 꼴찌 팀이었던 한화가 우승을 하는 기적을 보게 될지.... 이런 발칙한 상상을 하면서 이번 주 프로야구 스케줄을 뒤져 본다. 마침 한화 이글스가 잠실로 원정 경기를 온단다. 앞으로 두 시즌은 잠실 야구장에서 야구 리그가 진행된다고 하니 야구장과의 아름다운 이별을 위해 추억을 만들어야겠다. 오늘 만든 추억은 내일의 나에게 빛나는 기억이 될 터이니....
잠실 야구장은 사라져도 나의 추억은 죽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