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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와 잔치국수    
글쓴이 : 류승하    24-04-23 12:28    조회 : 948

아버지와 잔치국수

류승하

 

아버지는 여름이면 국수를 달고 살았다. 이 때문에 식당일 나가랴, 자식 둘 뒤치다꺼리하랴 몸이 남아날 일 없었던 어머니는 여름이면 가스불 앞에서 매일같이 땀 흘리며 국수를 삶아둬야 했다. “본인이 직접 삶아 먹으면 되는 거 아니냐는 요즘 시대의 기준일 테고, 아버지는 꼭 차려줘야만 먹는,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였으니까.

 

아버지는 국수 취향도 유별났다. 오직 대구식 잔치국수만 찾았다. 칼국수도, 칼칼한 장국수도, 냉면도, 우동도 좀체 먹지 않았다. 심지어 국수 면까지 가렸는데, 노란 비닐 포장에 들어 있는 소면이어야 했다. 아버지의 대구식 잔치국수는 그 소면을 물에 삶아 체에 한번 탁탁 밭치고, 미원을 대충 풀어 만든 국숫물을 조르르륵 붓고 고춧가루를 살짝 치고, 오이를 척척 썰어 물기를 탈탈 털어내 도로록 면 위에 얹은 뒤 후루룩 마시듯 말아먹는 것이었다.

 

이 정도로 국수를 좋아하면 고기 꾸미나 계란 지단을 하나 구워 올려 달라 요구할 법한데 아버지는 그러지는 않았다. 다만 풋고추는 꼭 내오라 매 끼 원성을 했다. 아버지는 꾸미로 얹은 오이를 국수 면발에 말아 와작와작 씹고, 큰 글라스에 소주를 반쯤 채워 쭉 들이켠 다음. 입가심으로 풋고추에 고추장을 찍어 콰삭 베어 물었다. 그리고 눈은 연신 텔레비전의 삼성 라이온즈야구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야구가 시원찮으면 제기미 오늘도 허빵이네라며 젓가락을 탁 내려놓고는 다 묵었다 자자, 테레비 꺼라했다.

 

그런데 말이다. 가끔 그 시절 아버지를 떠올리면 궁금해진다. 왜 그렇게 국수를 좋아했으며, 무슨 신성한 제사처럼, 매년 여름 늘 한결같이 국수만 찾았을까 말이다.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아버지가 그렇게까지 국수를 고집한 이유를 그 인생을 되짚어보고야 깨달았다.

 

육 남매 중간치기로 태어난 아버지는 열세 살 무렵부터 프레스 공장에 나가 맞아가며 일을 배웠다고 했다. 몇 푼 안 되는 돈은 가난하디 가난한 시골 집 농사 빚갈이에 부었던 모양이다. 좀 더 나이가 차서는 가난이 지겨워 사업을 해보겠다며 작은 공장을 차렸는데 그 공장은 망조가 들었다. 그 무렵 나와 동생이 태어났고 엄마는 망조 든 공장에서 기계를 돌리다가 손가락을 심하게 다쳤다. 아버지는 이때부터 술만 취하면 밑도 끝도 없이 미안하다고 하기 시작했단다.

 

아버지는 평생 미안함과 답답함을 씻어낼 곳이 딱히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매 여름 속에 천불이 올라올 때마다 잔치국수를 훌훌 풀어넣고 소주로 속을 씻고 풋고추를 씹었던 것이다. 그나마 매일같이 보는 야구가 아버지에게 그나마 활짝 숨 돌리고 웃을 수 있는 시간이 되어주었다. 그날 야구 경기 결과가 좋으면 난데없이 나를 쳐다보며 역시 이승엽이 최고 아이가라며 하이파이브 박수를 쳐달라던 아버지가 생각난다. 아버지는 정말 그런 날은 어린아이처럼 방방 뛰었다.

 

그 아버지는 자식들이 장성하자마자 큰병이 들어 세상을 떠났다. 그때 되레 내 속에 억울해서 천불이 났다. 이제 평생 자신을 괴롭혀온 빚 걱정도 안 해도 되고, 한여름 타드는 속을 국수로 내리지 않아도 되는 시절이 오자 병이 아버지를 덮쳤다는 게 납득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병을 앓던 그해 여름에는 결국 잔치국수를 먹지 못했다. 국수조차 한 그릇 말지 못하는 여름이라, 얼마나 속이 답답했을까.

 

올해도 어김없이 아버지가 없는 여름이 다가온다. 아버지 제사도 찾아올 것이다. 올해 성묘길에는 국수 소면을 삶아 가야겠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말해야겠다. 잘 살고 있으니 이제 더는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국수나 시원하게 훌훌 말아 넘기시라고, 유독 아버지가 생각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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