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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경소리    
글쓴이 : 정민영    13-04-19 11:02    조회 : 8,931
   풍경소리[1].hwp (16.5K) [0] DATE : 2013-04-19 11:02:52
 모녀지간의 일이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기분이 좋으면 다정한 자매처럼 지내다가도 뭔가 틀어지면 순식간에 견원지간이 된다. 막내와 아내는 요즈음 일촉즉발의 신경전 중이다. 아내는 전업주부이고 막내는 대학 2년생이다. 겨울방학이 되면 집안이 ‘좀, 조용해지겠지.’ 하고 기대를 했었다. 그러나 방학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막내의 늦은 귀가는 아내 인내심의 한계를 연일 시험 중이다. ‘하우우’하는 한숨소리가 안방에 차고 넘쳐 거실에까지 도달하면 난 밖으로 나가 담배 한 개비를 꺼낸다. 내가 생각해도 도움이 안 되는 남편이다. 모녀간에 전운이 감도는 집안에서 가장의 빈 공간은 없다. 아내를 응원하려니 딸의 청춘이 식어버릴까 두렵고, 청춘의 열정에 동참하려니 아내의 가슴이 데일까 걱정된다. 그녀들과 나는 다른 나라에서 와서 같은 집에 머무르는 여행객이란 생각이 들곤 한다.
 답답함은 계속되었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더니 20년 만의 폭설이 내렸다. 길은 덮이고 숲도 사라지고 온 세상이 눈 속으로 숨어들자 갈등도 멈췄다. 불안하면서도 조용한 며칠이 지난 새벽이었다. 내면의 불안감이 잠을 깨웠는지 평소보다 일찍 의식이 돌아왔다. 몸은 아직 이다.
 눈만 말똥말똥 굴리다가 불현듯 ‘아침 산책이나 가볼까.’하는 생각이 일었다. 추위에 견딜 수 있을 만큼 방한복과 목도리, 귀마개, 장갑 등으로 충분하게 무장을 하고 등산화를 꺼내 신고 길을 나섰다. 밖은 아직 캄캄하다. 천변의 조명등이 길을 밝혀주고 있을 뿐이다. 천변 길은 온통 하얀 눈밭이다. 조심조심 걸었다. 한 10여 분이 지났을까. ‘목적지를 어디로 할까.’ 하고 망설이다가 안양사를 향했다. 안양사는 집에서 20여 분 거리에 있는 유서 깊은 사찰이다.
 눈길을 아무 생각 없이 터벅터벅 걷다보니 어느덧 안양사에 도착했다. 대웅전 앞까지 갔다. ‘부처님께 예불을 드리고 갈까.’ 했는데 등산화를 벗기가 번거로워왔다. 대웅전을 바라보며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만 몇 번 읊조리다가 귀가 하였다. 그런데 대웅전을 뒤로 하고 돌아서는 마음이 편하지가 않았다. 그깟 등산화를 벗기가 얼마나 귀찮은 일이라고 그것을 핑계 삼아 부처님께 예를 표하지 않고 돌아선 행위가 부처님께 죄를 짓고 온 것만 같았다.
 예불을 하지 않고 돌아선 죄책감 때문인지 아침 산책을 할 마음이 일어나지 않았다. ‘눈이 녹으면 편안한 복장으로 아침 산책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금 새 며칠이 지났다. 양지 바른 길에는 눈이 다 녹았다. 음지에만 잔설이 조금씩 남아 있던 어느 날,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게 되었다. 다섯 시쯤 눈이 떠졌다. 일단 세수부터 하고 물 한 컵을 마셨다. 시원함이 가슴까지 전달되었다. 갑자기 기분이 상쾌해졌다. ‘오랜만에 산책을 가 볼까.’하고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그날따라 무척 기분이 좋았다. 어둠도 전날 삼켰던 세상을 조금씩 뱉어내고 있었다. 상쾌한 기분으로 시작한 아침 산책길은 내내 몸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가볍게 콧노래를 부르며 사찰 근처에 도착했다.
 웬일인가? 대웅전 옆에 대웅전 지붕보다도 훨씬 높은 키를 가진 미륵불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커다란 미륵불이 허공에 숨어 있다가 이른 새벽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반가운 마음을 담아 예불을 드리고 대웅전을 향했다. 대웅전 옆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가니 희미한 조명등이 부처상을 밝히고 있고 주위는 어두컴컴하였다. 부처상을 향하여 9배를 올리고 좌정을 한 후 명상에 들었다. 명상이라고 하여도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냥 앉아 있는 것이다. 한 십분 정도 지났을까. 누군가가 대웅전 안으로 들어왔다. 중년의 사내였다. 그는 대웅전에 들어와서는 부처상 앞에 있는 양초에 불을 붙이고 절을 했다. 나는 9배를 하고 대웅전을 나섰다. 대웅전을 나서는데 문 옆에 ‘촛불은 끄셨습니까?’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예불을 드릴 때는 촛불을 켜야 하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하니 무지에 스스로 낯이 뜨거워졌다.
 부끄러운 마음으로 대웅전 옆의 거대한 미륵불상에게 ‘잘 있어!’라며 눈인사를 하고 돌아서서 한 걸음을 옮겼다. 갑자기 ‘팅!’하는 청아한 소리가 새벽의 고요를 갈랐다. 무슨 소리일까 궁금해 하고 있는데 시원한 바람이 귓가를 스치고 간다. 또 다시 ‘팅’, ‘팅팅’ 하고 맑고 아름다운 소리가 들려온다.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도 없다. 풍경소리였다. 다시 바람이 일었다. 기다렸다. 사방이 고요한 숲, 산새들의 새벽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던지 풍경은 바람을 다시 잡지 않았다. 산사에서 천변입구까지는 5분정도의 거리다. 내려오는 동안 내내 풍경소리가 보였다. 꼭 부처님이 나의 예불공양에 응답한 것만 같았다.
 풍경소리는 시공간을 20여 년 전으로 순간이동 시켰다. 그 동안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부처님과 나와 막내 아이와의 관계를. 20여 년 전, 아내와 여덟 살 된 큰애의 집요한 갈망에 의해 동생을 갖기로 했었다. 의료보험 혜택도 받지 못하고 정관복원수술을 하여 둘째를 원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우연한 기회로 설악산의 금강굴을 방문하게 되었다. 급경사의 암벽을 타고 올라갈 만큼 보기에도 까마득한 암산 정상 부근에 위치한 금강굴은 원효대사가 수행한 암자다. 그곳에서 아이 하나를 달라고 촛불을 켰다. 그리하면 매 년 석가탄신일에는 가까운 사찰을 찾아 부처님의 공덕을 기리겠노라는 약속을 했다. 그 당시 난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그리고 10개월 후 설악산의 선녀가 우리 가족이 되었다. 처음 몇 년은 약속을 잘 지켰다. 아이가 성장하는 만큼 산사를 찾는 발걸음이 뜸해졌다. 아이가 성인이 되었을 때는 그러한 약속을 했었는지조차 가물가물해지고 말았다. 부처님은 풍경소리를 통해 그 약속을 기억하느냐고 나에게 묻고 있었다.
 요즈음 모녀지간의 갈등의 원인이 내가 약속을 저버려서 그리 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수많은 갈등의 시공간에서 내가 취했던 방관자적 행위가 부끄러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아빠의 자리가 새삼 무거운 짐으로 느껴졌다. 자녀에게 성실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이면 아빠 몫은 한 것으로 생각하며 살아오던 터였다. 잘못은 한 것 같은데 속 시원한 해결책은 떠오르지 않았다. 집을 향해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집에 도착해서 컴퓨터를 켰다. ‘풍경’이라고 검색어를 입력했다. 아무런 생각 없이 보아왔던 처마 끝에 달린 풍경에 심오한 뜻이 담겨있는 줄을 처음 알았다. 풍경은 수행에 게으름을 피운 스님이 죽어서 등에 나무가 자라는 물고기로 환생하여 고생을 하다가 대사의 도움으로 극락에 이른 후 자신의 뉘우침을 본받으라고 자기 모습의 형상을 만들어 처마 밑에 매달아 놓은 것이란다.
 아이를 대하는 부모의 자세는 풍경의 의미에 담겨있었다. 부모는 풍경의 물고기처럼 항상 깨어있어야 하고, 자녀를 바라보는 눈은 부처님의 자비로운 눈이어야 함을 또 다시 배웠다.
오늘 아침!
잠자리에서 전생의 부모를 만나고 있을 막내가 깨어나면, 아이에게 부처님의 미소를 날려 줘야겠다!

강희진   13-04-21 13:02
    
모처럼 저도 오늘은 글쓰는 휴일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흥미로운 전개가 돋보이는 글입니다..
건필하세요..
정민영   13-04-22 13:46
    
작가님!
    고귀한 시간을 내서 글을 읽어 주시고 격려하여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많은 지도 부탁드리겠습니다.
문경자   13-04-23 16:44
    
어머니와 딸의  사이에서 고민하시는 내용
잘 읽었습니다.
모녀간의 의견은 항상 다툼처럼 시작하여 끝이 나나 봅니다.
그 후로 잘 지내며 선생님도 마음의 안정을 찾았는지 궁금합니다.
금강굴에 가 본적이 있는데 오르는 길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정민영   13-04-23 20:36
    
감사합니다.
    작가님의 격려는 저에게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묘하게도 그 뒤로 막내가 저와 이야기를 자주하게 되었고 엄마와도 다시 친구가 되었습니다.
    더욱 잘 된것은 성격이 적극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도 매일은 아니지만 가끔 아침산책을 안양사까지 가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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