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 산책을 다녀오는데 길가에 밤 몇 톨 떨어진 것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줍고 나서 철조망이 둘러쳐진 울타리 안을 보니 어떤 할머니가 얼굴을 전부 가리는 마스크와 모자를 쓰고 열심히 밤을 줍고 있었다. 철조망으로 둘러쳐진 국가 땅인데 어떻게 들어갔을까 궁금하여 어떻게 들어가셨느냐고 물어봤지만, 힐끗 쳐다보고는 대답도 하지 않는다.
속으로 ‘오호! 강적인데?’ 하면서 내일 아침에 두고 보자고 다짐을 하고는 발길을 돌렸다.
컴퓨터 지도로 산 주위를 검색하여 대강의 산 둘레와 넓이, 길을 파악하고 난 다음 날 아침, 평소 다니던 길과는 반대로 올랐다. 철조망의 빈틈을 찾아 산속으로 들어가 보니 많은 나무들 중 군데군데 서 있는 밤나무 밑에는 아니나 다를까 조그마한 산 밤의 껍질들과 알밤이 몇 톨씩 떨어져 있었고, 밤나무에 달린 밤송이는 입을 벌리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밤나무 밑의 밤을 찾아 비닐봉지에 열심히 주워 담기도 하고, 또 밤나무 끝에 매달려 입을 벌리고 있는 주인 없는 밤송이들을 작대기로 후려쳐 주워 담았다.
예전에 닭을 키웠던 빈 슬레이트 계사 지붕 위에도 그동안 아무도 손대지 않았던 밤들이 수북이 쌓여 있어 모조리 쓸어 담았다. 횡재다. 저만치서 어제 그 할머니가 천천히 밤을 찾아 다가왔지만 이미 내가 다 주워 버린 뒤라 그 밤나무 밑에는 더 이상 주울 게 없었다. ‘많이 주우셨어요?’ 물어보지만 역시 대답이 없다.
실망하신 할머니가 다른 밤나무 밑으로 천천히 이동하시는 동안 나는 더 재빠르게 또 다른 밤나무 밑으로 가서, 나무를 흔들고, 발로 차고, 작대기로 후려치며 바닥을 샅샅이 훑어 눈에 보이는 밤톨은 전부 주워 담아 버렸다. 속으로 낄낄 웃음이 나오긴 했지만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한 시간 남짓 밤을 줍다 보니 어느새 출근시간이 되고 밤은 한 봉지 가득이라 내일을 기약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밤새 밤은 또 떨어질 테니까 할머니 걱정 마시고 내일 많이 주우세요’를 빌어 보지만 나도 내일 아침에 또 주울 생각이라 그다지 진심어린 기도는 되지 않았다.
이튿날 새벽에도 비닐봉지와 등산 지팡이를 들고 산으로 갔다. 내가 출근하고 난 다음 낮 동안 떨어진 밤들은 이미 할머니가 다 주웠을 테니 나는 밤새 떨어진 얼마 안 되는 밤들과 한참 벌어지고 있는 나무에 달린 밤송이 후려치기, 그리고 비탈진 길, 가시덤불 속, 할머니가 도저히 올라갈 수 없는 계사 지붕 위를 뒤져야만 했다. 그래도 군데군데 몇 톨씩 나온다. 어제보다 수확이 덜했지만 제법 묵직하게 주웠다.
며칠 계속하여 주워 모았더니 빨래 삶는 찜통에 절반은 되었다. 물을 부어 휘저으니 속이 덜 실한 놈은 물 위로 뜨는지라 모두 건져 버려 버리고, 뜨지 않는 속이 꽉 찬 놈들은 잘 말려 냉장고에 넣었다.
오늘 아침에도 할머니를 만났었는데 이젠 인사를 받아 주신다. 어디 사시느냐? 많이 주우셨느냐? 는 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할머니는 이제 힘이 없어 많이 줍지 못한다고 하셨다. 가시덤불도 많고 비탈진 곳에서 넘어져 다치기라도 하면 오히려 손해라며 조금씩 주워 맛이나 보고 싶다고 하셨다. 괜스레 미안해진다.
산 입구에 있는 할머니의 전원주택 앞까지 같이 왔다. 텃밭 한 귀퉁이에 키워 온 맨드라미가 좋다며 가져가라고 하셨지만 심을 때도 없어 사양하고 그냥 왔다.
“할머니, 저 내일 아침부터 밤 주우러 못 와요, 천천히 많이 주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