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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명 : 장정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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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발    
글쓴이 : 장정옥    12-12-11 19:00    조회 : 5,097
신발
 
 
 
                                                                                                                      장 정옥
 
  전날 내린 비 탓인지 유난히 햇살이 좋다. 나는 아들의 운동화를 비눗물에 담갔다. 요즘 아이들이 즐겨 신는 면으로 된 하얀 캔버스화이다. 녀석도 거의 매일 그 신발을 애용하는 터라 날 잡아 빨기가 쉽지 않다. 요즘이야 신발도 세탁소에 맡기면 편하지만 아무렴 구석구석 솔로 안쪽까지 닦아내는 것과 비할 수 있겠는가. 하얗게 때가 빠진 운동화를 햇살아래 세워두자니 내 나이 오십이 다 되도록 신고 버린 신발이 얼마나 되나 궁금해졌다.
  최초로 생각나는 신발은 검정고무신이다. 여자아이 것이라 그랬는지, 아니면 당시 유행이었는지 발등부분에 꽃이 그려진 것이었다. 그 신발은 고무줄을 하거나 팔방놀이, 달리기 할 때는 손에 벗어드는 것이 상책이고 개울에서 송사리 잡을 때 가장 유용했다.
  두 번째로 떠오르는 신발은 빨간 장화이다. 아버지가 막내에게 사랑의 표현으로 사 주신 그것은 생활용품이 귀하던 시절에 단연 독보적 가치를 지닌 것이었다. 동네에서 하나뿐이었던 그 신발은 하도 신어 구멍이 났는지 물이 들어가면 찌그럭찌그럭 소리가 났다.
  차마 신고 다니기가 아깝도록 예뻤던 흰색 구두나 옆에 똑딱단추가 달린 학생용 까만 구두 등, 그 뒤로도 수많은 신발이 내 발을 거쳐 갔고 지금은 여러 켤레의 신발을 가지고 있지만 특별한 기억은 없다. 그런데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이 아님에도 두 달 전 버리기 힘들어했던 신발이 떠오른다.
 
  지난 해 여름이 막 시작될 무렵, 가로수 아래 몇 켤레의 신발들이 두 줄로 늘어 서있었다. 그 옆에서 졸고 있는 아저씨의 그늘진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던 땀방울에 이끌려 바닷물 같이 시원한 색깔이 맘에 들어 신어보지도 않고 슬리퍼 한 켤레를 샀다. 그것은 가느다란 하얀 끈이 여러 개 교차된 것으로 바닥은 맑고 푸른 투명한 녹색인데 코타키나발루 해변의 바다색과 흡사했다.
  저녁 늦게 꺼내든 신발은 시커먼 비닐 봉투에서의 탄생만큼이나 부담 없이 질질 끌고 다닐 요량이었으므로 발에 잘 맞으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그런 가벼운 생각은 내 발이 슬리퍼를 신는 순간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신데렐라가 유리 구두를 신었을 때의 기분이 바로 이랬을까. 그것은 나를 위해 준비된 것처럼 정말 잘 맞았을 뿐 아니라 고급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 슬리퍼를 신고 나가면 만나는 이웃이나 친구들은 약속한 듯 모두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 신발 어디서 샀어?” 그러면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응, 이거 외제야.” 했지만 터무니없는 거짓말이 아닌 것은 분명 ‘메이드인 차이나’ 이기 때문이다.
  그 후로부터 점잖은 자리만 아니라면 난 하루도 빠짐없이 슬리퍼를 끌고 다녔다. 상쾌한 기분일 때도, 우울한 기분일 때도, 심지어 비가 내려도 애용했다. 시골집에 갔을 땐 옆집 강아지가 뒤축을 잘근거려서 다른 한쪽으로 그 강아지의 볼기짝을 내려쳤던 일도 있다. 다행히 솜씨 좋으신 아버지의 손길에 감쪽같이 상흔들이 사라지고 "네가 신으니 비싸 보인다."는 친구의 빈말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지던 그 슬리퍼였다. 그런데 그만 끈이 끊어져 현관 한쪽 구석에 처박힌 신세가 됐다.
 
  슬리퍼는 끈이 생명이다. 끈이 없는 슬리퍼는 가치를 상실했으므로 더 이상 존재의 이유가 없다. 싸구려 신발의 정체가 그러하듯이 그 슬리퍼 역시 고쳐서 사용한다는 것은 새로운 신발을 다시 장만하는 것보다 비경제적이다. 또한 구입 할 때부터 한번 사용 후 버려질 것을 이미 마음속에 암시하고 있었기에 그 어떤 미련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뜻 슬리퍼를 버리지 못해 현관만 비좁게 하고 있었다.
  그 신발은 외출용은 절대 될 수 없다는 분명한 마음의 자세가 확고하였다. 그것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과도 상통한다. 그런데도 왜 나는 쓸모없는 그 슬리퍼를 던져 버리지 못했던 것일까. 아마도 그 슬리퍼를 살 때 어떤 사심이 첨가되지 않은 행위와 함께 가격에 비해 흡족한 사용을 하게 된 때문이 아닌가 한다.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 의외로 좋은 결과를 가져왔을 때 느끼는 감정이 오랜 여운을 남기는 것처럼 말이다.
  살다보면 크고 대단한 일보다 작고 사소한 일들이 더 소중한 기억들로 남고 삶의 기쁨을 준다. 큰일 한 가지를 함께하기보다 여러 번의 작은 일을 함께 할 때 인간관계가 더 돈독해지는 것과 같이 생각해보니 그런 평범한 이유들로 쓸모없는 슬리퍼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생명이 다한 것은 언제나 폐기처분 된다. 버려질 때 그것의 가치나 용도는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한다. 버려질 슬리퍼로 인해 한 가지 교훈을 얻었다면 비록 고상하거나 고귀하지는 않았지만 본분을 다하고 생명이 끝나는 것은 그 가치를 상승시킨다는 것이다. 존재가 상실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드러나게 된다는 사실이다. 지극히 평범한 내가 비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비법을 슬리퍼를 통해 배운 것이다.
  부르지 않아도 한결같이 준비 된 마음으로 내가 가는 곳은 여지없이 따라 나서서 가야 할 곳으로 재촉하던, 외출용이 아니었기에 오히려 꾸미지 않은 인간적인 내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줬던 신발. 내 부끄러움과 서러움, 고단하고 고통스러운 일상, 진실과 가식들을 모두 바라보며 말없이 침묵으로 나를 질책하고 위로하던 슬리퍼. 길거리에서 포장도 없이 허접한 만남만큼이나 의미 없는 신발이었지만 열 달이 넘도록 내 분신이 되어주었던 그 슬리퍼를 결국 어젯밤 쓰레기통에 넣고 말았다.
 
  요즘 나는 신발가게의 유리창 너머로 맘에 드는 슬리퍼를 고르는 중이다. 오늘도 여전히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있지만 선뜻 문을 밀고 들어서지 못하는 이유를 나는 알고 있다.
 
 
 
발표:월간 순국 2012.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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